■ "여성시대는 여성의 책임 필요… 여대 첫 ROTC 용기 냈죠"
한영실 숙명여대 총장은 "21세기 총장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용기"라고 했다. 왠만한 중소기업 못지 않은 규모의 예산을 갖고 살림살이를 해야 하는 대학 CEO에겐 선택을 강요받는 중요한 순간들이 적지 않고, 이때마다 총장의 용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의미일 게다. 한 공중파 방송의 정보 관련 프로그램에 식품영양 분야 패널로 출연하면서 유명세를 탄'스타 교수'출신인 그의 용기가 십분 발휘된 영역이 여대 최초의 ROTC(학군단) 설치다. 여성의 사회적 책임을 구현하기 위한 방편으로 여성 ROTC 유치에 용기를 쏟아부은 것이다.
한 총장은 여성 리더십에 대해 특히 관심이 많다고 했다. 여성 리더십은 대학 교육에서 길러져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다. 여성 리더십과 관련한 과목들이 숙명여대에 유독 많은 것도 이때문이다. 한 총장은 본보 주최로 지난해 열린 2010 세계여성컨퍼런스에서 외국 유수의 여성 리더들 앞에서 한국 여성 교육의 방향과 비전을 구체적으로 제시해 주목받았다. 그는 "나는 이제 더 이상 여대 총장이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_여대가 왜 ROTC를 유치했을까요. 단순히 여군 자원 확보 차원은 아닌 것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먼파워시대, 여성시대, 소프트파워시대가 열렸다'는 얘기를 하고 있어요. 하지만 진정으로 그런 시대를 열려면 여성이 먼저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과거 아이 많던 시대엔 고생하는 부모 밑에서 여성이 희생을 감수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어요. 안보교육도 물론 받았구요.(교련을 뜻한다) 국민 의무에 대한 태생적인 소명의식이 있었던 거지요. 그렇지만 지금은 한 집에 아들 하나 있기도 힘든 시대 아닙니까. 병역의무를 해야하는 인구의 절대 숫자가 줄었어요. 그런데 대한민국은 여전히 분단국가로 남아있어요. 이럴 때 여성이 나서야 한다고 판단했어요. 이제 전쟁은 첩보전에다 심리전이고 IT(정보기술)전이라고 여기고 있어요. 여성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영역들이지요. 남성 병역 자원이 부족하다고 해서 다른 나라에서 용병(勇兵)을 데려올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요. 여성도 국방의무를 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ROTC를 유치하게 된 겁니다. 물론 여대생들이 결혼후 가정과 자녀를 갖는 경우도 염두에 뒀어요. 어머니가 어떤 생각을 갖느냐가 자녀에게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안보에 관해 여성들의 인식이 자녀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고 보고 있어요."
_여성도 병역의무와 안보를 도외시해선 안 된다는 말로 들립니다.
"그런 셈이지요. 북한의 여군이 우리의 30배를 넘는다는 통계가 있어요. 북한은 전체 군인 중 15%가 여군이지만 우리는 3.3%에 불과해요. 이런 현실을 알면서도 어떻게 가만히 있겠어요."
_다른 여대도 ROTC가 만들어져야한다고 보나요.
"여군 자원 확보는 안보 관점에서 접근해야 해요. ROTC 설치를 원하는 여대에도 문호를 개방해야 해요. 숙명여대가 먼저 시작했기 때문에 성공적으로 안착시켜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있어요."
최근 숙명여대 총장실에선 '출정식'이 열렸다. 10일부터 3주간 일정으로 군사훈련을 받기위해 입소하게 될 학생들이 신고를 하러 나타난 것이다. "뽑아놓고 걱정을 많이 했는데, 복장을 갖춰 입고 온 학생들을 보니 그렇게 든든할 수 없었어요. 개교 104년만에 전투복 입은 여성 30명이 총장실에 들이닥친 것은 처음이지요. 감격했어요."
한 총장은 25년의 교수 생활을 하면서 여대생들한테서 이런 '혁혁한 눈빛'을 마주한 경험은 없었다고 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예비 여성 군인들에게 단 한마디만 했다. "4성(星) 장군 한명만 나와달라"고.
_대입 전형이 마무리 단계입니다. 대입자율화가 벌써 4년째 접어들고 있지만 정작 자율화는 답보 상태라는 지적이 많습니다. 입학사정관제도 구설에 올라 있습니다.
"대입 자율화와 입학사정관제는 이제 시작입니다. 긴 호흡을 갖고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뜻이지요. 시행착오가 반복될 것입니다. 하지만 입학사정관제도 자체는 이상적인 제도라고 봐요. 제대로만 된다면 신뢰를 쌓을 수 있어요. 시골에서 부모 농사일을 도우며 공부한 아이들과 도시에서 학원 등 사교육 혜택을 받으면서 자란 아이들을 똑 같은 잣대로 평가할 순 없어요. 숙명여대는 입학사정관제를 통해 입학한 시골 출신 학생들에겐 기회를 주는 게 필요했어요. 지역 핵심인재 멘토 교수를 구성했지요. 교수들이 일대일로 멘토 역할을 하고 있어요. 교수들의 평가가 아주 좋습니다."
_다른 대학에?입학사정관제로 뽑은 시골 출신 학생이 수업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얘기도 들리고 있어요.
"영어가 약간 뒤처지는 것은 맞아요. 그래서 이런 학생들이 참여하게될 영어 그룹을 따로 만들어 교육시키고 있는데, 효과가 만점입니다. 비교적 입학사정관제를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자부해요.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훌륭한 입학사정관을 두는 것이라고 봐요. 공정하고 안목 있는 입학사정관을 선발하고 교육시켜야 하는데 이게 어려워요.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좋은 입학사정관을 모실 수 있어요. 재정과도 연결되는 부분이어서 쉽지만은 않아요."
한 총장은 입학사정관 선발을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기고 있었다. "대교협이 입학사정관을 교육하고 선발하는 프로그램을 도입하기로 해 기대가 크다"고 말한 것도 수준 높은 입학사정관 확보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또 입학사정관 전형을 통해 뽑힌 학생들의 자질이나 수준이 일반전형 합격자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입학 때보다 졸업 때 성적이 얼마나 향상됐느냐가 중요한 것 아닌가요. 아무리 실력 좋은 학생들이 들어와도 결국 수학ㆍ영어 문제 몇 개 더 맞히는 정도의 차이일 뿐이라고 봐요. 대학 와서 열심히 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되는 거죠. 영어ㆍ수학 점수가 다소 떨어져도 어려운 형편에서 의지갖고 공부한 학생들은 또 다른 능력이 있어요."
_대학이 입학사정관제 전형을 하면서 정부 돈을 받는게 과연 적절한지에 대한 논란이 있어요.
"정착할때까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찾아가지 않아도 입학하려는 학생들이 널려 있는데 굳이 전국 곳곳을 돌며 면담하고 평가하는 작업을 누가 할려고 하겠어요. (이런 부분 등에 예산이 필요하고)정부 지원이 뒤따라야 한다고 봐요. 안착이 돼 학교 현장의 기록 등을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단계가 된다면 (정부 재정 지원을 받아야하는)사정이 달라지겠죠다."
_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대입 관련 업무를 넘겨받은 대교협에 대해 말들이 많습니다. 회원 대학들 입장을 중시하는것보다 정부 입김에 좌지우지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대교협이란 조직이 여러 대학들이 낸 회비로 운영되는 집단이다 보니 불만도 있고 공감대 형성이 어려운게 사실입니다. (총장들이)다들 바쁘다 보니 한 목소리를 내기도 힘들어요. 이사회 역할이 목소리를 내는 것인데 그렇지 못한 부분은 인정해요. 여론을 취합해 가야 하는데 그런 과정 과정이 쉽지 않아요. 대학마다 상황이 다르고 이해 관계가 엇갈리기 때문에 잡음이 생긴다고 생각해요."
_외국 대학 중 벤치마킹할 만한 대학이 있나요.
"작지만 강한 대학인 미국 다트머스대를 꼽고 있어요. 입학이 어렵고 학점 같은 것도 없어요. A학점 받으려고 원론적인 내용에 집착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지요. 다트머스대는 학생들에게 넓은 세상을 보라고 가르칩니다. 숙명여대도 그런 방향을 추구하고 있어요. 다트머스대 같은 대학을 만들고 싶은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_대학의 경쟁력은 재정문제가 뒷받침돼야 하지 않을까요. 기여입학제에대해 본격적으로 논의를 할 때가 됐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기여입학제를 하려면 사회가 더 성숙해야 해요. 외국 유수 대학의 경우 기여입학제가 흔하지만 우리나라는 시기상조가 아닐까요. 우리나라에선 기여입학제로 입학하면 다른 학생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겁니다. 부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여전히 강해요. 부자를 인정하고, 존경할 부분이 있으면 존경하고, 재산의 사회 환원 등도 색안경끼지 않고 받아들이는 성숙한 사회가 우선적으로 조성돼야 겠지요. 기여입학제 여건이 안 되어 있다고 판단해요."
_등록금은 어떻게 하실 계획인지요.
"오늘(18일) 동결하기로 결정했어요. 사실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지난 2년간 등록금을 동결했고 교수 월급도 올리지 않았어요. 굉장히 긴축재정을 한 것이지요. 등록금 동결은 학교가 해야 할 일들을 축소할 수 밖에 없는 결과로 나타납니다. 학교가 많은 일을 해야 학생에게 혜택으로 돌아가는 법입니다. 그게 안되니까 갑갑해요. 하지만 사회에 대한 대학의 역할도 무시할 수는 없다고 판단해요. 학부모와 학생들의 어려운 상황을 감안한 결정이라고 보면 될 겁니다."
한 총장은 총장들 사이에"할말은 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문에 괜한 오해를 산 경험도 있다. 정부 정책에 대해서도 일침(一鍼)했다. "정책을 입안하고 결정할 때 오래 생각한 뒤 신중하게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한 번 만든 것은 쉽게 바꾸지 말고 인내심을 갖고 지켜보는 자세도 필요해요. 정책이 매년 바뀐다면 학교 현장은 어떻게 되겠어요. 교육은 농사처럼 길게 보고 해야 합니다."그가 생각하는 교육은 진득한 농사꾼이었다.
인터뷰=김진각 편집위원 kimjg@hk.co.kr
정리=박철현기자 kara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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