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이슥해서 퇴근하는 길에 함박눈이 쏟아졌다. 아파트로 들어서는데 경비 아저씨들이 가래로 눈을 밀고 경사로에 염화칼슘을 뿌리느라 야단 법석이다. 진입로부터 치워야 하니 각 동으로 통하는 샛길엔 눈이 수북했다. 빗자루를 찾아 들고 오랜만에 눈을 쓸어보았다. 부지런히 좌우로 빗자루를 놀리자 가르마처럼 길이 열리는 게 재미가 있다. 어릴 적 시골집 마당 눈 치우던 일이 생각나 잠시 그리움에 젖었다. 부모님 칭찬 들을 생각에 추위도 잊고 마당을 다 쓸고, 고샅까지 길을 낸 뒤 돌아보며 뿌듯해 하던 기억이 새롭다.
■ 조금 수고한 덕에 고슬고슬하게 마른 길을 오갈 때마다 여간 기분이 좋은 게 아니다. 며칠 뒤에도 눈이 내리자 아침 일찍 나가 또 눈을 쓸었다. 경비원이 바쁜 손길을 멈추고 인사를 건네며"이 아파트에서 근무한 지 3년인데 눈 쓰는 입주민은 처음 본다"고 한다. 아파트 같은 공동주택단지는 으레 관리실 직원이나 경비원들이 치우려니 하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요즘처럼 유난히 눈이 자주 내리면 그들만으로는 감당이 안 된다. 그걸 보면서 그냥 지나치는 것은 무심한 처사다. 조금이라도 손길을 보태는 게 당연하다.
■ 낮에도 영하의 날씨가 계속되는 바람에 눈이 한 번 내리면 좀처럼 녹지 않는다. 발길에 번질번질 다져진 빙판길은 아차 했다가는 미끄러져 크게 다치기 십상이다. 일부 지방자치단체들이 내 집과 점포 앞 눈 치우기 조례를 제정해 시행해 오고 있지만 권장조항에 불과해 별 실효성이 없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최고 100만원까지 과태료를 물릴 수 있도록 자연재해대책법을 개정하자는 방안이었다. 그러나 국가와 지자체의 책임을 개인에게 미루는 행정편의주의적 발상이라는 비판이 거세자 없었던 일로 하는 모양이다.
■ 노력 없이 손쉽게 문제를 해결하려 하니 잘 될 리가 없다.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눈 치우기에 동참하도록 여건과 분위기를 만드는 방법도 있다. 경기 성남시 복정동 주민센터는 주민들이 많이 오가는 인도와 버스 정류장에 빗자루 등 제설 장비를 눈에 잘 띄게 비치했다. 그러자 폭설이 내린 날 버스를 기다리는 승객들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정류장 주위의 눈을 쓸고 경사진 골목길에 염화칼슘을 뿌렸다. 부드럽게 마음을 움직여 선택하게 하는 넛지(nudge)의 사례라 할 만하다. 이런 발상이 늘어나면 굳이 과태료 같은 강제 수단을 들먹이지 않아도 내 집 앞 눈치우기는 곧 정착될 게 틀림없다.
이계성 논설위원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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