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했던 여자를 수십년 찾아 헤매다 우연히 길에서 만난다. 얼마 후 둘 사이에서 난 아들의 존재까지 확인, 모든 갈등이 풀리려는 찰나 주인공은 교통사고를 당한다. 그리고 그대로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다.
# 헌신적으로 내조하던 아내를 한 순간의 오해로 내치고 바로 내연녀와 새 출발을 약속한다. 어떤 변명도 하지 않는 아내는 내연녀의 악행을 알면서도 인내하고 정치인을 꿈꾸는 엘리트 남편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한 채 상황을 받아들인다.
30%대의 높은 시청률로 지상파 TV 시청률 1위를 지키고 있는 KBS1 일일 드라마 ‘웃어라 동해야’와 ‘아내의 유혹’의 김순옥 작가가 쓰는 SBS 주말 드라마 ‘웃어요 엄마’의 한 대목이다.
이 드라마들뿐 아니다. 비밀이 밝혀지려는 순간에는 꼭 교통사고가 난다. 어깨 넘어 등 뒤에서 누군가 엿들어도 드라마 속 인물들은 절대 알아채지 못한다. 나쁜 짓만 일삼던 악인이 한 순간에 착해지는가 하면, 심지어 얼굴에 점 하나 찍고 나타나도 다른 사람으로 받아들여진다.
안방극장을 점령한 드라마들에 최소한의 개연성도 갖추지 못한 비현실적인 설정이 넘쳐난다. 시청자들은 욕하면서도 이런 드라마를 본다. 출생의 비밀, 불륜, 복수 같은 자극적 소재나 비현실적 전개에 이미 길들여진 까닭이다. 이 드라마들은 어떻게 안방극장을 점령했을까.
익숙하고 자극적이어야 먹힌다?
‘웃어라 동해야’에서 윤새와(박정아)는 자신의 결혼이 파탄날 것을 우려해 동해(지창욱)와 안나(도지원)가 제임스(강석우)를 만나지 못하게 하려고 갖은 애를 쓴다. 더 짜증스러운 것은 그녀가 끊임없이 주변 인물들의 대화를 엿듣고 해결책을 마련하는 것으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얼굴에 점 하나 찍고 다른 사람이라고 우겨도 그러려니 하고 받아주니 이제 드라마 작가들은 황당하지만 익숙한 코드에 드러내놓고 기댄다. 2009년 5월 ‘막장 드라마’라는 비판 속에서도 시청률 40%를 넘은 ‘아내의 유혹’의 김순옥 작가는 종영 5개월 만인 10월 ‘천사의 유혹’이란 복제품을 선보였다. 전작에 비해 밀도가 다소 높아졌을 뿐 복수 주체를 아내에서 남편으로 바꾼 복제품이었지만, 시청자들은 여전히 자극적인 드라마의 유혹을 뿌리치지 않았다.
그러나 시청자들의 눈높이가 높아지고 취향이 다양화하면서 그런 유혹이 마냥 통하지는 않을 듯하다. 재벌과 서민의 사랑이란 뻔한 소재를 다루면서도 설득력 있는 설정과 극 전개로 호평 받은 SBS ‘시크릿 가든’ 열풍은 그런 시청자들의 변화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경쟁작 누르려 극약처방… 질 저하 불보듯
같은 시간대 방송되는 드라마보다 시청률을 더 내기 위해 각종 사고나 기억상실 같은 극적 장치들을 남발해 긴장감을 높이는 것도 드라마의 질을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방송 관계자는 “경쟁 드라마에서 센 장치가 나오면 ‘더 세게 나가서 일단 경쟁작을 누르고 보자’는 식이다 보니 교통사고나 기억상실 같은 극약처방이 남용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방송사 쪽에서 작가 등 제작진을 압박해 대본이 수정되는 일도 다반사라고 한다.
이렇다 보니 극한 상황은 극적 갈등을 고조시키는 섬세한 장치이기보다 앞뒤 없이 불쑥 등장하는 의례적 도구가 돼버렸다. 한 드라마 작가는 “상황을 우연의 연속으로 몰아가는 것이 예전에는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요즘에는 누구나 다 그렇기 때문에 그냥 별 생각없이 쓰는 추세”라고 말했다. 그는 “김수현 작가의 작품이 비슷하다는 평가를 받으면서도 계속 사랑 받는 것은 같은 소재라도 새롭게 변주하고 사건이 충분한 개연성을 띠고 녹아들게 하기 때문인데, 요즘은 그런 노력을 하는 작가가 드물다”고 덧붙였다.
본방송 시청률로만 평가...잣대 바꿔야
3,4회 분량의 대본만으로 촬영을 시작하는 관행 탓에 시청률에 따라 이야기의 흐름이 완전히 바뀌거나 결말이 달라지기도 한다. 이런 환경에서 사전제작은 오히려 독이 된다. 거액을 들여 100% 사전제작한 MBC ‘로드 넘버원’은 5%대의 초라한 시청률로 종영했는데, 방송가에서는 시청자의 바람을 그때그때 반영하지 못한 것을 주요 패인으로 들고 있다.
프로그램 성패의 유일한 잣대인 시청률 산정 방식에 대한 비판도 나온다. 인터넷 다시보기나 휴대폰 등 다양한 방법으로 TV를 즐기는 현실에서 본방송 시청률만 따지는 것은 낡은 방식이라는 것. 일례로 ‘시크릿 가든’의 16일 최종회 시청률은 35.2%였지만, 주시청층이 대부분 본방송을 보는 덕에 시청률 1위를 고수하고 있는 ‘웃어라 동해야’에 비해 체감 시청률은 훨씬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방송가에서도 시청률만이 아니라 작품성과 완성도를 반영한 평가 잣대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채지은기자 c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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