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개봉한 ‘이끼’는 상영 전부터 여러 화제를 뿌렸다. 강우석 감독이 처음으로 만화 원작에 소리와 영상을 입히고, 오랜만에 스릴러에 도전한 점이 눈길을 끌었다. 무엇보다 유선이 수수께끼의 여인 이영지 역을 맡으며 충무로 호사가들의 입이 바빴다. 영화계 입지가 좁은 유선이 강 감독 영화로는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1998) 이후 12년 만에 주요 인물로 등장한 여자 배역을 맡았기 때문이다.
‘이끼’로 맺어진 인연은 20일 개봉하는 ‘글러브’로 바로 이어졌다. 청각장애인 고교 야구단을 지도하는 교사 주원을 연기했다. 지난 12일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유선은 성취감과 흥행에 대한 기대로 밝았다.
주원은 밝고 낙천적이다. 사고뭉치 퇴물 프로야구 선수 상남과는 티격태격 신경전을 벌이면서도 묘한 감정을 나눠야 하는 역할. ‘가발’(2005)과 ‘검은 집’(2007) 등에서 주로 어두운 감정을 선보였던 그와는 별 연이 없던 연기다. 유선은 “처음 도전하는 캐릭터라 촬영 초기엔 신경이 많이 쓰였다”고 말했다.
유선은 ‘글러브’를 찍기 전엔 “야구 포지션조차 잘 몰랐다”고 했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 3개월 동안 수화도 배워야 했다. 그러나 이젠 “야구는 공이 아닌 사람이 들어와야 점수가 나는 종목이라 그만큼 인간적”이라 말할 정도로 야구에 빠졌다. 표정과 수화가 자연스레 조화를 이룬 연기는 합격점. “어두운 이미지의 유선이 밝은 연기를 제대로 해낼까”라는 의구심은 털어내도 좋다.
촬영 과정은 대체로 만족스러웠지만 불만과 아쉬움도 있었다. 그럴듯한 대사는 상만이 독차지하고 자신은 수화로 이를 전달해주는 역할에 그친 것 아니냐는 생각 때문. “‘아우, 멋있는 것은 상남 혼자 다해요’라고 감독님에게 불평을 하기도 했고, 출연 분량이 다 담기지 못해 좀 아쉽기도 하다”고 그는 말했다.
유선에겐 “아나운서 같다”는 말이 오래도록 따라다녔다. 지적이면서도 조금은 차가운 얼굴이 만들어낸 선입견 탓이다. 그도 “귀에 박히게 들은 그 말을 정말 싫어했다”고 말했다. “그런 이미지를 깨고 싶어 2003년 이후 방송 진행을 맡지도 않았고, 드라마 ‘솔약국집 아들들’의 복실이 역을 더 망가진 모습으로 연기했다”고도 밝혔다. 그는 “ ‘글러브’로 제 연기 폭을 넓힐 수 있어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글러브’에서 주원은 청각장애 제자들을 위해 성심을 다한다. 상남이 “아주 엄마구먼, 엄마”라고 비아냥거릴 때 관객들이 웃음으로 화답할 정도로 그의 연기엔 모성애가 담겨있다. 그래서일까. 그는 2월 촬영에 들어가는 ‘돈 크라이 마미’에서 딸의 억울함을 씻어주기 위해 고투하는 엄마의 모습을 그린다.
그는 “강 감독님이 제의하면 작은 역할이라도 기쁜 마음으로 할 것”이라고 말했다. “강 감독님 덕분에 영화계에 이름을 분명히 알릴 수 있게 됐기 때문”이란다. 2월 개봉하는 장진 감독의 휴먼코미디 ‘로맨틱 헤븐’에 이어 ‘가비’ 등 그의 출연작이 줄을 잇고 있다.
“‘가비’에선 고종 암살을 배후 조종하는 사다코라는 야심만만한 인물을 연기해요. 전 산뜻하고 발랄한 역할보다 존재감이 강하고 뿜어내는 에너지가 강한 캐릭터가 좋아요. 근사한 역할 보다 인간적인 배역에 더 끌린다고 할까요.”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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