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다섯 살인 현형이는 또래 아이들과 달리 누구보다 힘든 시간을 견뎌온 아이다. 2007년 태어난 뒤 한 동안, 엄마와 아빠 말곤 다른 사람을 접할 수 없었다. 베트남에서 시집 온 엄마(32ㆍ레티두)는 한국말이 서툴러 집 밖에 나가길 꺼려했고, 2교대로 공장에 나가는 아빠는 그나마 집에 있는 시간 대부분을 잠으로 보냈다.
그래서 현형이에겐 엄마가 세상의 전부였다. 엄마 외 다른 식구에겐 접근조차 꺼렸고 엄마와 1㎙만 떨어져도 심하게 울어댔다. 엄마는 현형이 때문에 집안 일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2008년 3월 처음 부산 동래종합사회복지관을 찾았을 때 엄마와 잠시 떨어지자 반복적인 구토 증상까지 보였던 현형이는 당시 심리검사에서 '분리불안'진단을 받았다. 원인은 '언어 장벽'에 있었다. 우리 말에 익숙하지 않아 집 밖 출입을 꺼리는 다문화 출신의 엄마와 붙어 자라다 보니 현형이마저 의사소통은 물론 전체적인 발달장애를 겪게 된 것이다.
그러나 현형이는 다른 아이가 되었다. 엄마와 함께 복지관내 KB한글배움터에서 놀이치료를 받으며 한편으론 '기본한글 배움터'에 참여해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게 됐다. 이제는 할머니, 할아버지 품에도 잘 안긴다. 엄마도 '다문화 엄마를 위한 한글반'에서 갈고 닦은 실력으로 '한국말하기 대회'에서 상까지 탔고, 지금은 이주여성을 대상으로 한글강사 역할까지 하고 있다. 현형이 할머니는 "며느리와 손자가 한글 배움터에 나가면서 모든 가족이 행복해졌다"고 밝게 웃었다.
국민은행이 2008년부터 '다문화아동 한글교육 및 보육지원사업 지원단'을 통해 지원하고 있는 KB한글배움터는 원래부터 한글 교육이 목적은 아니었다. 다문화 이주 여성들이 한국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한국어, 요리 등을 배우러 복지시설을 찾을 때, 엄마를 따라 온 다문화 가정 어린이들을 돌봐주면서 시작됐다.
당초에는 단순히 애들을 돌보는 수준이었으나, 이왕이면 한글도 가르치며 시간을 보내자는 쪽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한 관계자는 "다문화 아동 대부분이 일반 아동들에 비해 의사소통이 늦고, 말이 느리거나 부정확한 경우가 공통적으로 발견됐다"며 "복지관마다 다문화 영ㆍ유아에 맞춘 전문 보육시설을 개ㆍ보수하고, 이들의 특성에 맞는 다양한 보육 프로그램도 개발하게 됐다"고 말했다.
2009년부터는 '찾아가는 한글배움터'도 시작했다. 그마나 복지관을 찾아올 수 다문화 부모들은 여러 혜택을 중복해서 받을 수 있지만, 도시와 떨어진 산골ㆍ도서 지역 다문화 가정은 정작 도움이 절실한데도 소외되고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국민은행은 YWCA 등 지역 활동가 단체를 후원해 매주 또는 매달, 격오지의 다문화 가정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동해, 목포, 청송 등 5개 지역의 일부 동네에서는 다문화 가정이 모여 한글을 배우는 '부락단위' 배움터가 생겼고 둘 이상 모이기 힘든 지역에는 가가호호 방문해 엄마와 함께 하는 한글배움터를 열고 있다. 지금까지 3년여 동안 KB한글배움터를 거쳐간 다문화 아동은 모두 394명이나 된다.
격오지 방문 교육의 대표 수혜자는 세살배기 민영이다. 민영이네 집은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 큰길에서도 20여분을 들어가야 나오는 경북 청송의 산골. 주변에는 폐가와 밭이 전부다. 베트남 출신 엄마(28) 역시 현형이네와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다. 가장 가까운 베트남 친구 집까지도 차로 30분이 넘게 걸리니 한국사람은 물론, 민영이는 가족 아닌 다른 사람과의 접촉조차 어려웠다. 한국말이 서툰 엄마는 민영이와 대화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지난해부터 매주 방문을 시작한 한글배움터 선생님은 그래서 민영이에게 새로운 세상이나 다름없다. 장난감, 동화책을 들고 찾아온 선생님에게 엄마와 함께 배우는 한글은 민영이뿐 아니라 민영이네 집 전체에도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전남 목포 인근 섬(신안군 자은면)에 매주 2번씩 배를 타고 들어가 부락단위 한글배움터를 진행하고 있는 목포YWCA 민윤심 전담보육교사는 "한글배움터가 외부와 접촉하기 어려웠던 다문화 엄마들에게는 서로의 외로움을 달래는 통로로, 아이들에게는 사회성 함양 공간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다문화아동지원단의 허지인 간사는 "비록 한국말이 서툴더라도 '방치'보다는 다문화 엄마들의 적극적인 교육과 소통이 훨씬 도움이 된다"고 강조한다. 그는 "영ㆍ유아기 아동 발달은 주 양육자와의 상호작용이 무엇보다 중요한 만큼 시어머니나 남편이 한국어로 의사소통하기를 원한다고 해서 아예 말을 붙이지 않는 것보다는 출신국 언어로라도 아이와 더 많은 얘기를 나눠야 한다"고 조언했다.
두려움 때문에 집안으로 숨기보다는 밖으로 적극 도움을 청하는 용기도 필요하다. 외부사람과 관계를 가져본 적 없는 아絹湧?처음 배움터에 나오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산만하고 부적절한 과잉행동도 보이지만 이는 체계적 교육과 또래 아이들과의 어울림을 통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것. 논산YWCA 윤진영 교사는 "한글 배움터를 통해 다문화 엄마들이 가정 내에서 신뢰를 얻고 자녀 교육에 자신감을 갖는 모습이 특히 감동적"이라고 전했다.
국민은행 관계자는 "다문화 가정에 대한 일회성ㆍ행사성 지원보다 진정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지원을 지속적으로 넓혀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김용식기자 jawohl@hk.co.kr
■ 국민은행 다문화 지원 사업
국내 최대 은행인 국민은행은 '기업과 사회의 아름다운 공존'을 위해 다문화 가정을 다양한 분야에서 지원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외국인 근로자와 그 가족에 대한 의료지원 사업이다. 2007년부터 의료사각 지대에 놓인 이들에 대한 무료진료 사업을 후원하고 있는데, 국내에 거주하면서도 의료보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의 현실에 주목하고 시민단체들이 운영하는 이주민의료센터의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지난해 1월에는 수도권 지역 이주민의료센터 중 노후화된 곳을 골라 직접 개ㆍ보수 작업을 해 주기도 했다.
다문화 가정의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 환경 개선사업도 국민은행이 주목하고 있는 분야. 교육시설이 부족한 지역에 도서관을 만들어 주는 '작은 도서관' 사업을 국내 다문화 가정 아이들에게 확대 실시하고 있다.
지난해 6월 경기 시흥시에 '다문화 작은 도서관'을 열어 외국인 근로자와 가족들에게 연고가 있는 국가의 언어로 된 책을 보급하고, 한국어 교육 기회도 제공해 지역사회로부터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이와 함께 국내 유명 한글 그림 동화책을 외국인 근로자와 다문화가 가정 아이들의 모국어로 번역해 보급하는 사업도 펼치고 있다. 2008년에는 베스트셀러인 '넉점반'을 중국어와 베트남어, 캄보디아어로 번역해 그림동화는 9,000권, 오디오북을 3,000권 가량 지원했으며 2010년에도 '강아지똥' 번역본 9,000권을 다문화 가족지원센터와 작은 도서관에 제공했다.
특히 국민은행의 다문화 가정을 위한 지원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동시에 진행하고 있는 게 특징인데 '라온아띠' 활동이 대표적이다. 국민은행의 지원으로 대학생으로 구성된 국제자원봉사단 '라온아띠'(즐거운 친구들이라는 뜻의 순 우리말 고어)는 아시아 저개발 지역에 봉사요원을 파견해 가난, 기아, 재해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지역민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펼칠 수 있었다. 2008년 8월부터 진행해온 이 활동은 매년 반기마다 30명의 대학생 봉사단을 선발해 현지에 파견 ▦장애아동 지도 ▦취약계층 아동 언어교육 ▦결식아동 급식 등의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국민은행은 외국인 근로자의 모국을 지원하는 활동도 함께 진행하고 있다. 가장 최근에는 국민은행 사회봉사단이 캄보디아의 대표적 빈민지역인 씨엠립을 직접 찾아가 봉사활동을 진행했다. 씨엠립은 세계적 관광명소인 '앙코르와트'가 있는 곳이지만 지역 주민들이 수상가옥에 거주해 교육 및 보건환경은 열악하다.
국민은행은 2008년부터 이곳 주민들을 위해 주택 신축과 개ㆍ보수작업을 지원하고, 현지의 프놈끄라움 초등학교 시설 개선작업을 해 주는 활동을 펼치고 있다. 국민은행 관계자는 "단발성 이벤트가 아니라 매년 봉사단을 현지에 파견해 지역주민들과 꾸준히 소통하면서 국민은행은 물론 한국에 대한 이미지까지 개선되는 효과를 얻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손재언기자 chinas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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