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만하
틈을 주무른다. 애절한 눈빛으로 서로를 더듬는 알몸의
포옹이 만드는 캄캄한 틈. 멀어져가고 있는 지구의 쓸쓸한
등이 거느리고 있는 짙은 그늘. 진화론과 상호부조론 사이
를 철벅거리며 건너는 순록 무리들의 예니세이강. 설원에
쓰러지는 노을. 겨울나무 잔가지 끝 언저리. 푸근하고도 썰
렁한 낙탓빛 하늘 언저리. 안개와 하늘의 틈.
지층 속에서 원유처럼 일렁이고 있는 쓰러진 나자식물
시체들의 해맑은 고함소리. 바위의 단단한 틈. 뼈와 살의
틈. 영혼과 육신의 틈. 빵과 꿈 사이의 아득한 틈. 낯선 도시
에서 마시는 우울한 원둣빛 향내와 정액빛 밀크 사이의 틈.
외로운 액체를 젓는 스푼.
존재는 틈이다. 손이 쑥쑥 들어가는 적막한 틈이다.
● 장구한 시간의 틈(나자식물), 광활한 공간의 틈(지구), 첨예하게 대립하는 관념의 틈(진화론과 상호부조론), 현실의 틈(빵과 꿈), 질감의 틈(바위), 존재 형태인 기체와 액체의 틈(향내와 밀크)…,
틈의 세계가 참 넓고 깊군요. 틈 하면 좁거나 딱딱한 것들의 사이를 떠올려 보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물리적으로 보면 틈은 허공 아닐까요. 아무리 큰 틈이라도 틈은,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는 허공의 일부에 지나지 않겠지요.
사물과 사물 사이가 그렇듯 관념과 관념 사이도 틈이 경계를 나누면서 연결하고 있네요. 틈은 포괄적이고 배타적이네요. 틈이 없으면 개체가 존재할 수 없겠네요. 무한천공의 한 자락인 틈의 힘을 빌려 존재하다가 틈으로 돌아가, 틈이 되어 틈을 남기는 것이 개체군요. 어떤 존재보다도 틈의 시공은 무궁무진하지요. 그래서 모든 존재는 거대한 틈 사이에 간신히 틈을 내며, 틈의 틈으로 존재하는 것이군요.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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