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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무의 선비 이야기] <69> 오윤겸의 인품과 국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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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무의 선비 이야기] <69> 오윤겸의 인품과 국량

입력
2011.01.17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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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윤겸(吳允謙ㆍ1559~1636)은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사람이다. 영의정은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이다. 따라서 영의정은 국가를 경영하는 소신과 리더십을 갖춘 사람이어야 했다. 오윤겸도 그러한 소신과 리더십을 갖춘 인물이었다.

오윤겸은 다른 인재들에 비해 발신이 늦었다. 36세의 늦은 나이에 문과에 급제했고, 그 전에는 미관말직에 종사했다. 그래서 정철(鄭澈)이 이산해(李山海)에게 사윗감을 구해달라고 해서 오윤겸을 추천했더니, 이산해는 이덕형(李德馨)과 같은 준재를 고르면서 정작 자신에게는 오윤겸과 같은 시원치 않은 사람을 추천했다고 절교를 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오윤겸은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과 덕행을 쌓아 수문(首門)이 되었다. 그는 대인(待人) · 접물(接物)에 있어서 언제나 모가 나지 않았고, 자기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여 겸허한 태도를 보였다. 몸가짐이 단정하고 엄숙한 중에서도 봄바람과 같은 화기(和氣)가 있어서 사람들에게 친밀감을 주었다. 그는 또한 정경세(鄭經世)와 함께 가장 경전에 밝은 사람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실력을 갖춘 재상이었다는 말이다.

오윤겸은 과거시험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 오희문(吳希文)의 간절한 소망 때문에 과거시험을 보기는 했다. 그래서 과거 시험문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응시하지 않고, 다 써 놓은 답안지에 다른 사람이 실수로 먹물을 쏟아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런데 평강현감으로 있을 때 우연히 문과에 응시해 급제했다.

오윤겸은 훌륭한 목민관(牧民官)으로서도 유명했다. 백성을 사랑하고 세금을 경감해 주어 가는 곳마다 선정비가 섰다. 인사는 공정했다. 인조 반정공신 구사맹(具思孟)이 그의 아들 구성(具宬)을 대사성에 임명하려 하는 것을 끝까지 반대했으며, 평소에 대소관료들에게 벼슬할 만한 사람들을 추천 받아 적재적소에 사람을 쓰니 인조조차도 자기가 쓰고자 하는 잡류들을 쓸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인조반정 후에 반정공신이 아닌데도 혁명과업을 완수해야 하는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오윤겸은 서인이었지만 당색을 초월했다. 그래서 오윤겸은 남인 같은 서인이요, 이수광(李睟光)은 서인 같은 남인이라는 말까지 생겼다.

무엇보다도 오윤겸이 지도자로서 출중한 것은 국가를 위해서 목숨을 걸었다는 것이다. 그는 고위관료로서 목숨을 걸고 인목대비의 폐비를 반대했고, 인조가 추진하는 생부 정원군(定遠君)의 원종추숭(元宗追崇)을 반대했다. 그리고 1616년(광해군 9년) 통신사로 일본에 갔다 오다가 풍랑으로 죽을 뻔 했고, 1622년(광해군 14년) 희종(熹宗) 황제의 등극사로 명나라에 갔다 오다가 역시 풍랑으로 죽을 뻔 했다. 다른 사람들은 요리 저리 피하고 가지 않았으나, 오윤겸은 지명을 받자마자 서슴없이 갔다. 이와 같이 지도자는 국가를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한다.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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