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우)면 추운 거고. 귤 사세요. 마딨어요(맛있어요)."
18일 오전 서울 중구 명동거리. "춥다 추워"를 연발하는 행인들 사이로 세 살 때 인삼을 잘못 먹어 장애를 얻었다는 유상기(54)씨가 주먹만한 귤을 팔고 있었다. 두툼한 검은색 점퍼에 등산화, 영락없는 등산객 차림이다.
"안 입으면 죽어. 내복 두 개나 입어 끄떡없어." 나름의 방한대책을 호기롭게 말했지만 귤을 집는 손은 덜덜 떨고 있었다. 이날 서울의 아침 최저 기온은 영하 10도, 뻥 뚫린 거리에 앉아 삭풍을 피할 도리가 없으니 온도계 숫자보다 몸이 느끼는 추위는 더 가혹할 터. "먹고 살려면 추워도 나와야지"라고 말하는 그가 종일 "2,000원에 5개"라고 외쳐보지만 동장군에게 쫓기는 시민들의 발걸음을 세우기엔 역부족이었다.
동토(凍土)라고 불릴만한 한파의 위세가 꺾일 기미가 없다. 피하는 게 상책인지라 대부분 실내로 숨어들기 일쑤. 그러나 추위와 싸우며 거리를 지키는 이들이 있다. "원래 일하는 곳이 여기니까"라는 심드렁한 대꾸부터 "밥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는 푸념까지 혹한을 견디고 이겨내는 그들을 찾아 나섰다.
눈물까지 쏙 빼놓는 추위에 굴하지 않고 시종 웃어야 하는 이가 있었다. 서울 영등포 한 백화점의 주차도우미 조모(25)씨는 "너무 추워 가만히 있어도 입이 덜덜거리고 눈물이 난다"고 했다. 그런 그에게 '손님은 왕이다'는 도우미의 철칙은 차라리 고통이다. "몸매를 포기하고 기모스타킹(보온처리 된 스타킹)을 세 겹이나 껴 입었어요. 지금 웃고 있지만 웃는 게 아니예요."
시간당 4,000원 가량을 받고 전단을 나눠주는 이들은 사람들의 손이 그립다고 했다. 명동에서 만난 정여진(29)씨는 "행인들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니니까 (전단을) 줄 곳이 없다"고 말했다. 영등포역 인근에서 일하는 김모(25)씨 역시 "손 대신 가방을 들이밀거나 쇼핑백에 넣어달라고 하는 이들이 많다"고 했다.
스스로 추위를 곱절로 키우는 건 오토바이를 끌고 배달을 하는 이들의 숙명이다. 삭풍이 증폭시키는 체감온도는 상상 이상이다. 이들은 "헬멧을 써도 배달 끝내면 귀가 꽝꽝 얼 정도다. 그래도 배달시간 늦는 거보다 낫다"고 했다. 동대문에서 만난 한 피자배달원은 "길은 미끄럽지, 손은 시리지. 이럴 때는 더 춥더라도 속도를 올려 배달을 빨리 마치는 게 상책"이라고 했다.
반면 추위에 '운수 좋은 날'을 외치는 사람도 있다. 영등포구에서 폐품을 수집하는 김모(68)씨는 "오늘 나와 보니까 평소보다 상자도 많고 버려진 의자도 많아 횡재한 느낌"이라고 웃었다. 꽁꽁 언 날씨에 거리의 폐품을 수집하는 이들의 수가 급격히 줄었기 때문. 실제 용두동에서 고물상을 운영하는 최모(43)씨는 "요즘 고물 주워오는 노인들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각자 나름의 추위 퇴치 방법도 있다. '무한정 껴입기'(주차도우미) '신발 바닥에 손난로 깔기'(전단 배포) 등은 고전적인 방식. 최근에는 남녀의 경계도 사라졌다. 동대문에서 옷감을 배달하는 최승진(48)씨는 "창피하지만 다들 여자 레깅스나 스타킹을 입고 다닌다. 일단 추운데 어쩌겠느냐"고 털어놨다.
기상청에 따르면 16일 서울의 아침 최저기온이 영하 17.8도로 절정에 달했던 추위는 19일 영하 9도로 조금 약해질 전망이다.
남상욱기자 thoth@hk.co.kr
강윤주기자 k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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