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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한류의 허(虛)와 실(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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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한류의 허(虛)와 실(實)

입력
2011.01.14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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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황제> 의 영화음악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일본 작곡가 류이치 사카모토의 내한공연이 있었다. 객석은 수준 높은 청중으로 가득 메워졌고 대중성을 뛰어 넘어 예술성과 실험성을 중시하는 사카모토의 음악에 매료되었다. 일본 애니메이션으로 세계를 제패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음악과 <월컴 투 동막골> 로 한국에 많은 팬을 가진 히사이시 조의 내한공연 입장권도 매진되었다고 한다.

가와이 겐지, 이와시로 타로, 사기스 시로 등 내로라 하는 일본의 작곡가들도 한국영화의 음악을 만들며 시장을 넓히고 있다. 한국의 작곡가로서 일본 작곡가들의 한국진출과 성공이 달갑지 만은 않다. 하지만 일본 영화음악가들이 한국에서 누리는 인기의 비결이 그들이 참여했던 영화의 뛰어난 작품성에 있고 본질적으로 그들의 음악이 획득한 예술적 보편성 때문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국적을 떠나 음악을 즐기는 애호가들의 취향에 대해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한국의 영화음악가로서 일본 대도시를 순회하며 한국 영화음악 공연을 가진 적이 있다. 공연이 성사될 수 있었던 배경은 내 음악 때문이 아니라 배용준씨가 출연한 영화 <외출> 의 음악을 맡은 덕이었다. 당시 공연을 찾아 온 청중의 거의 전부는 음악 애호가들이 아니라 40~50대 주부들로 구성된 배용준씨의 광적인 팬들이었다. 일본 음악가들의 한국공연을 찾는 관객이 젊은 층을 중심으로 한 음악 애호가들로 구성된 것과는 딴판이다. 음악이 좋아서 찾아 온 한국의 청중들과 달리 일본의 청중들은 종교적인 수준으로 열광하는 한국 배우들을 향한 연민을 음악을 통해 느끼고 싶어 하는 듯했다.

몇 년 전 일본 아시히신문의 1면에 실린 한류의 뿌리를 찾는 연재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 신문은 일본에서 한류의 시작을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찾는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몇 개의 상영관에서 소규모로 개봉되어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키며 반년 넘게 수많은 관객을 끌어 모았다. 그 때부터 일본 사람들은 전혀 모르던 한국영화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기 시작했으며 한국 영화의 일본 수출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의 영화팬들은 남녀노소 구별 없이 한국영화의 수준 높은 작품성에 열광했다. 그 후 한국영화에 대한 열광은 영화의 작품성보다는 한국배우들에 대한 열광으로 바뀌었다.

발 빠른 한국영화 제작자들은 경제적으로 윤택한 40대 전후 주부들로 구성된 일본의 한류시장을 노리고 작품성보다는 배우들을 중심으로 한 상업적이고 기획적인 영화를 만들어 비싼 값에 수출했다. 특수한 시장의 기호에 맞춘 상업적 의도로 인해 일본 수출용 한국영화들은 일본인들의 반감을 일으켰고 영화의 작품성에 대한 불신은 일본영화 수입사들의 담합으로 이어져 '금 따는 콩밭'이었던 한국영화의 수출시장은 급전직하의 내리막길을 걸었다.

대중예술의 해외진출은 작품의 보편성과 진정성을 기본으로 하지 않으면 오래갈 수 없다는 엄숙한 경고다. 예술의 근본은 작품성이다. 근본이 없는 대중예술은 외면당하게 마련이다. 열광하는 시장의 기호에 발 빠르게 맞추는 상업적 기획력에 앞서 한국 대중예술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겠다는 사명감과 책임감이 전제되지 않으면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해외진출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떠한 보편성과 진정성으로 세계인들의 심금을 울리는가가 중요하다. 불량품을 해외에 파는 일은 결과적으로는 한국 대중예술의 해외진출을 가로 막게 된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한국의 드라마는 여전히 일본과 동남아시아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고 한국의 10대 소녀 그룹들의 음악도 일본에서 큰 인기라고 한다. 한국영화의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한다.

조성우 영화음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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