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2001년 2월 발생한 구제역으로 양과 소, 돼지 등 460만 마리를 살처분하는 최악의 사태를 겪었다. 방역 당국은 유럽연합(EU) 지침에 따라 구제역 발생 농가의 가축은 24시간 안에 살처분, 땅에 묻거나 소각 처리했다. 또 반경 3km 인접 농가 가축은 48시간 안에 처리했다. 그러던 4월 말, 한 인접 농가에서 소 15마리를 매몰 처리한 닷새 뒤에 생후 12일된 송아지가 살아남아 죽은 어미소의 젖을 빨고 있는 게 발견됐다. 살처분 약물주사를 빠뜨린 듯했다. 주인은 송아지를 집으로 데려와 젖병을 물리고'불사조(Phoenix)'라고 불렀다.
■ 온 몸의 흰 털과 순진한 눈망울이 유난히 돋보인 송아지는 살처분의 비극성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됐다. 선정적 언론과 공영 BBC방송까지 송아지를 처리하려는 당국과 주인의 실랑이를 톱뉴스로 다뤘다. 그러자 구제역에 감염되지도 않은 송아지를 살려 두라는 온정론이 쏟아졌다. 몇 달째, 멀쩡한 가축까지 무더기로 죽여 파묻고 불태우는 잔혹상을 지켜본 영국인들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기회를 얻은 분위기였다. 결국 블레어 총리가 직접 나서 송아지를 살리기로 결정했고, 대중 언론과 여론은 환호했다.
■ 농업수산식품부는 마지못해 살처분 원칙을 바꿔, 인접 농가의 감염 여부를 가려 처리하기로 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공황 상태에 이른 구제역 때문에 선거까지 연기한 정부가 여론을 무마하려는 정치적 고려를 앞세웠다고 비판했다. 구제역이 수그러드는 상황이지만, 인접 농가 살처분(contiguous culling)과 매몰 처리는 전염력이 무서운 구제역 확산을 막는 가장 확실한 방법임을 일깨웠다. 당시 네덜란드는 긴급한 구제역 예방을 위해 백신을 주사한 가축까지 결국 살처분했다. 백신 효과가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 송아지'불사조'는 탈 없이 성장, 새끼를 낳을 때마다 뉴스가 됐다. 그러나 권위 언론은 구제역 공포에 무고한 가축과 애완동물까지 죽이고 내다버린 사회의 위선을 꼬집었다. 과거보다 구제역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는 것은 육류 탐식(貪食)과 밀집 사육, 집단 도살을 위한 장거리 가축 이동 때문이다. 이건 반성하지 않으면서, 살처분을 탓하고 죽은 가축을 동정하는 것은 '위선의 극치'라고 논평했다. 2001년 사태에 관한 의회 조사보고서도 살처분과 전국적 가축이동 금지가 더욱 신속, 엄격하지 않아 재앙을 키웠다고 지적했다. 우리 사회의 살처분 논란에 참고할 만하다.
강병태 논설위원실장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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