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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 에세이] 행복 증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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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 에세이] 행복 증후군

입력
2011.01.14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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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적인 일화보다 죄와 거짓과 사고와 피해자가 더 눈에 띄는 뉴스와 신문이 늘 싫었다. 게다가 누가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 내 능력으로는 잘 판단되지 않아서 더더욱 그랬다. 그런데 신문으로 인해 별난 취미가 생겼다. 선물로 받은 긴 지갑에 돈 대신 감동적인 글을 접어넣고 다닌다. 내용이 생각이 안 나면 접어넣은 신문을 꺼내어 줄 친 부분을 읽는다. 밥집에서 찻집에서 거실에서 그 어딘가에서.

최근 방영된 한 TV 프로에서도 감명을 받았다. 세시봉 멤버들의 노래와 인생을 대하면서 아, 저분들은 이미 반세기 전에 전통가요의 틀을 벗어난 노래를 만들었구나! 다 아는 사실인데도 무척 새롭고 그들의 오랜 우정이 부러웠다. 예술은 저런 관계에서 보다 풍요롭게 잉태되고 태어나고 빛나고 넘치면서 이어지는구나. 물론 윤선도는 유배지의 삶, 시련을 기회로 삼아 '오우가'와 '어부사시사'라는 명시를 지어 영원히 사는 생을 받았다.

그런 영향으로 시인은 어딘가에 던져져서 온갖 시련과 고독을 견디며 죽음을 건너는 자세를 작품으로 보여줘야 한다고 다짐했던 것은 아닌가. 시대를 읽는 골계미와 회의와 항전보다는 교훈적 시만 지나치게 우위에 둔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을 TV 덕분에 하게 됐다.

아무튼 체득한 세계관의 밀도만큼 웅숭깊어지는 것이 작가의 내공이라면 발로 뛰지 않고 어찌 가슴으로 아프고 가슴으로 행복할 수 있으랴? 올부터는 내 나이가 좋아하는 시를 쓰고 싶었다. 간절하면 이뤄질 수도 있는가. 30년 만에 어울려 떠나는 여행, 전남 신안군에 있다는 증도를 향해 떠났다. 그것도 부부동반으로. 바다의 한 귀퉁이를 함께 간 이웃이 사주었다. 소나무 3그루와 태양까지 얹어 주었다. 어디에나 있는 태양이 그 순간엔 내 앞에만 있는 것 같았다.

쓰러져 눕는 일몰을 보며 보이는 것들이 너무나 행복해서 탄성을 지르며 칼질하는 나를 보았다. 내가, 나를, 베어내며 마늘을 다졌다. 무를 썰어 방금 칼질한 것들을 버물려 끓였다. 저를 섞어 끓인 맛을 맛보는 밤, 눈까지 내렸다. 파도소리에 얹혀서 눈이 울 때 나의 옛날도 얹혀서 울며 행복이라 부르는 밥을 처음 먹었다. 눈과 바다가 만나 보여주는 저 허심탄회한 소회에 실려 우리도 눈이 되고 물이 되어 내리고 흘렀다.

바닷물이 빠져 나가버리니 내 속내까지 뼈가 드러났다. 배를 타고 조금 멀리 나가고 싶었다. 생사의 경계에 서서 생(生)을 가출할 때나 챙길 법한 가방을 들고 험한 밤의 골목길을 돌고 돌았던 어제들이 떠올라서다. 거기엔 어제를 건져 올릴 낚싯대가 있을 것 같았다. 너무 늦었지만 어제들에 박힌 가시와 화살을 빼내주고 싶었다. 그러나 숨어서 112가지 가시와 화살을 빼낼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수많은 당신들은 그토록 밝은 곳에서 아무런 걱정 없이 웃고 있을 때 그토록 밝은 곳이란 나에게 참담함이 낱낱이 드러날 곳일 뿐이었지. 그런 곳에 수없이 발을 들여놓았던 어제들과 새삼스레 악수나 할 뿐인가. 아니다. 참담했던 어제들과 살아보지도 못하고 침몰된 시간들을 건져 올릴 낚싯대는 이미 저마다의 가슴에 품었으리라. 112개의 가시와 화살이 지킨 행복을 드러난 뼈에 살처럼 붙여주고 돌아섰다.

박라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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