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명이 조직적으로 대항했지만 실패
함바집 브로커 유상봉(65ㆍ구속기소)씨, 그는 어떻게 함바집 업계의 '전국구'로 군림하게 됐을까. 두툼한 인맥을 어깨에 걸친 유씨는 로비를 통해 함바집 운영권을 어렵지 않게 손에 쥘 수 있었고, 그 아래 운영업자들은 그가 사냥해온 함바집을 넘겨 받아 두둑한 돈을 챙겼다. 그의 도움을 받은 업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유씨의 도움으로 업계는 태평성대를 누렸다. 당시엔 우리의 관계가 영원할 줄 알았다"고 했다. 수도권 주요 도시에 대형 아파트 단지들이 들어서고, 재건축 붐이 일기 시작하던 2002, 2003년쯤의 일이다.
하지만 2~3년 정도 시간이 흐른 뒤 '우리의 관계'에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유씨의 도움으로 2개의 함바집을 운영했던 이모씨는 "언제부턴가 유씨가 중개 수수료로 받아 챙기는 돈이 많아지기 시작하더니 함바를 내려 받는 순서가 헝클어졌다"고 말했다. 업계를 지탱하던 룰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건설 예정 아파트 단지의 세대 규모에 따라 공사장 인부 인원이 잡히고 이에 따른 예상 수익과 수수료가 정해졌던 게 기존의 관행이었다. 하지만 공급(운영권)은 줄고 수요(함바집 업자)는 늘면서 갈수록 수수료가 높아졌고 운영권이 돌아가는 순번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고 한다. 유씨의 욕심이 본격적으로 커지기 시작하면서 함바집 운영권은 조금이라도 돈을 더 주겠다는 업자에게로 넘어갔던 것이다. 함바집 업자들이 스스로를 '봉봉'으로 부른 이유다. '유상봉의 봉'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유씨의 폭리에 대응하기 위해 2004년 말 서울, 경기 지역에서 34명의 함바집 운영자들이 조직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함바집 운영업자들의 모임인 이른바 '함바회'다. 이들은 김모 회장을 필두로 총무, 회계ㆍ법무국장, 기획국장, 홍보국장, 운영위원 등 조직적인 집행부를 만들어 유씨에 대응했다. 당시 조직국장을 맡았던 김모씨는 "업자들이 뭉쳐서 업계의 정보를 공유하기 시작하자 유씨가 상당히 곤혹스러워했다"고 회상했다.
함바회의 조직으로 유씨가 제공하는 함바집 운영권 가격이 까발려지고 유씨의 측근을 통해 조달 받던 식재료가 가격에 비해 질이 떨어진다는 등의 사실이 드러났다.
하지만 함바회는 2년을 채 넘기지 못했다. 유씨 측이 과거처럼 업자들을 휘두를 수 없게 되자 함바회를 와해시키기 위한 방해 공작에 나섰던 것. 이 모임의 한 관계자는 "일부 운영업자들은 협박까지 받아 모임에서 이탈했고 결국 모임은 와해됐다"고 말했다.
정민승기자 msj@hk.co.kr
김현수기자 ddacku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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