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뿔테 안경에 배 볼록 나왔지만…내 춤보며 사회의 약자들이 웃을때 행복"
"나이 많다고 놀리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면 어때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다 좋아하는데."
가볍게 웃는 김기용(43)씨를 보면서 머릿속에 그렸던 그의 모습을 곧바로 지웠다. 40대 비보이라기에 생김새, 옷차림, 행동거지 등이 톡톡 튀거나 분방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두꺼운 뿔테 안경과 볼록 나온 배가 그런 상상을 즉각 날려버렸다. 제 나이 대의 저 평범한 얼굴과 몸매로 비보이 춤을 어떻게 출지 작은 의심을 하는 순간, 교회 안 연습실로 끌고 들어가 음악을 틀고 기술을 보여주었다.
"이것 프리즈라고, 춤 마무리할 때 하는 순간 정지 동작입니다." 어깨를 바닥에 대고 다리를 천장을 향해 쭉 뻗은 뒤 잠시 동작을 멈추며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는 머리를 대고 물구나무를 서서 빙빙 돌다가 "영화에서 많이 보았죠? 헤드스핀이고요", "이렇게 어깨를 바닥에 대고 다리를 벌린 뒤 몸을 돌리는 것은 윈드밀"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춤을 보다가 저 나이에 저렇게 과격한 춤을 추어도 괜찮을지 걱정이 됐다. "순발력과 체력이 떨어지고 숨도 가쁩니다만 뭐, 괜찮습니다. 비보이 오래 하면 팔 다리 허리에 무리가 가지만 관록도 그만큼 쌓여 부상 피하는 법을 절로 알게 됩니다. 젊었을 때보다 오히려 덜 다치지요."
_40대 비보이가 또 있습니까.
"글쎄요, 옛 방식으로 춤추는 친구들은 있겠지만 저처럼 요즘 방식으로 추는 40대는 없을 걸요. 양현석 이주노 현진영 등이 저와 비슷한 시기에 춤을 추었는데 그 친구들 지금은 춤 추지 않습니다. 과거 저와 팀을 이뤄 춤 추었던, 남성 듀엣 듀크의 김성민이 얼마 전 '형, 나이가 몇인데 그런 춤 추느냐'고 제게 핀잔을 주었습니다. 저를 '원로 비보이'라고 부르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_요즘 춤과 과거 춤이 다르지 않습니까.
"1980년대 중반 제가 처음 배운 춤을 올드스쿨 춤이라고 합니다. 그때는 헤드스핀이나 윈드밀 같은 것 하나만 하면 됐는데 뉴스쿨 기술을 익힌 후배들은 여러 동작을 섞어 춤을 춥니다. 요즘은 음악도 비트가 강한 힙합 계통을 사용하고요. 과거 기술로 지금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면 박자가 어긋납니다."
그는 비보이로서 나이만으로도 화제가 될 법한데 노동조합 등의 집회에서 춤을 선보임으로써 더 눈길을 끌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노동 비보이'라는 또 다른 별명이 붙어 있다.
_기륭전자 노조문화제 등에서도 춤을 추었다면서요.
"직장에서 인사가 불합리하다고 지적했다가 2008년에 해고됐습니다. 복직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를 들락거리다가 그곳 소장이 제가 춤 춘다는 사실을 알고는 기륭전자 노조문화제에서 한번 춰보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정말 쑥스러웠습니다. 비정규직 직원들이 비장한 각오로 파업 하는 곳에서 그런 춤 추어도 되는지 걱정이 됐거든요. 박남정의 '널 그리며' '사랑의 불시착', 박상철의 '자옥아'를 부르며 춤을 추었더니 사람들이 박장대소하더라고요. 아, 저렇게 좋아하는 구나, 저 역시 놀랐습니다. 그런 집회에서 비보이 춤을 선보인 것이 처음이었을 겁니다. 그 뒤 시간 날 때마다 기륭전자 노조 행사에 갔습니다."
영화 보고 춤에 빠져, 4년 동안 프로 댄서로
그는 2008년 청계천변에서 열린 열사문화제에도 참가했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숨진 열사들의 부모, 형제가 모인 자리에서 또 비보이 춤을 추었다. 머리를 땅에 댄 채 몸을 빙글빙글 돌리는 그를 보고 전태일의 어머니, 박종철의 부모님 등 참석자들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진보 성향 문인들이 하객으로 참석한 결혼식장에서도 같은 춤을 추었다. 그의 춤을 본 문화평론가 진중권은 "진보진영은 대중성이 부족한데 이런 사람이 있다니 놀랍다"며 "재주를 계속 가다듬어야 한다"고 했다. 노래패 꽃다지의 한 선배는 "이 판에 노래 잘하는 사람은 많지만 비보이 춤 추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다"며 치켜세웠다.
그가 춤에 빠진 것은 1983년 중 3 겨울방학 때 영화 '플래시댄스'를 보고서다. 영화에 나오는 브레이크 댄스는 화면조작이라는 의심이 들 정도로 놀라웠고, 마이클 잭슨의 문워크 댄스는 심장을 뛰게 했다. 10대 중반의 그는 춤을 배우겠다며 대학로로 뛰어가고 미군부대 근처를 배회했으며 디스코텍에 들락거렸다. AFKN을 시청하고, 춤 영상이 나오면 동작을 기억하기 위해 눈을 부라렸다.
그때 춤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배운 지 6개월 만에 가리봉동 근처 다방, 나이트클럽 등이 개최하는 춤 대회에 나가 1등을 했다. 하지만 춤에 미치다 보니 학교 생활은 엉망이 됐다. 밤에 싸돌아 다니니 낮에는 졸음이 밀려왔다. 꼬박꼬박 졸다가 선생님들 눈 밖에 났고 결국 고 2 때 학교를 그만 두었다.
89년에는 프로덕션에 들어가 프로 댄서가 됐다. 오후 9시부터 다음날 새벽 6시까지 하루 열 여덟 군데를 뛴 적도 있다. 한 군데 일 마치면 다음 장소로 달렸는데 서둘러 움직이다 보니 교통사고가 많았고 치아도 많이 상했다. 한 동안 평택, 천안 등에서 일하다 집에 왔더니 누나가 결혼해있었다. 가족사를 함께 못했다는 자괴감과, 춤이 평생 직업이 될지에 대한 의구심이 동시에 밀려왔다. 4년에 걸친 전문 춤꾼의 생활은 일단 그렇게 막을 내렸다.
그렇다고 춤과 영영 결별한 것은 아니었다. 틈틈이 후배들과 만나 최신 춤을 배웠다. 프로 세계 경험이 있는지라 다른 사람 춤추는 것 잠깐만 보고도 따라 할 수 있었다. 93년에는 SBS의 '꾸러기 콘테스트'에 나가 엉덩이 춤으로 1등을 했다.
그렇지만 그 무렵 그는 평범한 직장인으로 변신해 있었다. 2년 정도 다닌 신학교에서 지금의 아내와 만나 96년 결혼하고 제과회사 영업사원으로 일했다. 그 아내가 어느 날 "당신 춤 잘 춘다고 자랑만 하지 말고 TV에 나가 디지털카메라 하나 타오라"고 떠밀었다. 그래서 2004년 MBC의 '팔도모창'에 나가 춤 추고 노래했다. 디카는 못 탔지만 담당 PD로부터 "재능이 있다"는 칭찬은 들었다.
춤은 약자에 대한 배려, 무료 공연 계속 할 것
2006년에는 서울사이버대학 노인사회복지학과에 입학했는데 이를 계기로 복지관, 요양소 등에서 봉사 공연을 시작했다. "다운증후군 환자, 한센병 환자, 치매노인 앞에서도 춤을 추었습니다. 지난해 연말에는 보라매병원 환자들 앞에서 춤추고 노래했고요. 사람들이 시큰둥하면 어쩌나 그런 걱정 때문에 춤 추기 전에는 요즘도 쑥스럽지만 일단 춤을 추면 다들 즐거워하고 저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경기 양평의 장애인 시설에서 공연하는 동영상을 보면 장애인 관객들이 보인 반응은 가히 열광적이었다. 박수는 기본이요, 손가락으로 하늘을 찌르고 몸을 부르르 떨었으며 흥을 못이겨 무대로 뛰어올랐다.
"비보이 춤을 처음 보기 때문에 그럴 겁니다. 복지시설에서 하는 공연은 대부분 트로트 또는 민요를 부르거나 율동을 보여주는 정도입니다. 그런 것만 보아온 사람들이, 몸을 뒤틀고 물구나무를 서는 비보이 춤에 열광할 수 밖에요."
그들의 반응을 접하면서 말로 표현하기 힘든 보람을 느낀다. "집회 현장이나 복지시설 등에서 춤 추는 것을 저는 약자에 대한 관심의 표현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미국 뉴욕의 뒷골목에서 약자들이 자신의 처지를 알리고 평화와 안식을 기원하며 만든 것이 힙합이고 비보이 춤이거든요. 저의 재능으로 남을 웃게 할 수 있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가 공연을 하는 것은 후배들에게 본보기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비보이가 세계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있지만, 나이 먹은 뒤에도 직업으로 삼기에는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저는 후배들에게 세속적 성공 여부를 떠나 비보이로서 봉사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무료로 공연했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그런 점에서 비보이센터 건립은 하나의 숙원이다. 비보이 문화에 녹아있는 자유로움, 약자에 대한 배려 등을 춤을 통해 익히게 하고 싶은 것이다. 캄보디아의 비보이 타이니툰스센터처럼, 가정 형편이 어렵거나 문제아로 찍힌 청소년들이 춤을 추며 꿈을 가꿀 수 있기를 그는 소망하고 있다.
박광희 편집위원 khpark@hk.co.kr
사진=고영권기자 youngk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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