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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현장, 사흘간의 동행] (2) 국립현대무용단 오디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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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현장, 사흘간의 동행] (2) 국립현대무용단 오디션 현장

입력
2011.01.12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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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몸으로 문장을 쓰는 춤꾼들…그들에겐 땀이 화장품, 춤이 옷이었다

서로 눈치만 봤다. 열 명 중 선택받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을 수 있었다. 다른 응시자 앞에서 먼저 실력을 노출하는 것은, 까닥 잘못했다간 기다리는 이들의 용기만 북돋는 일이 될 터였다. 침묵을 깨고 서른을 훌쩍 넘긴 것처럼 보이는 남자가 담담히 걸어나왔다. 지원자 중 가장 연장자인 듯했다. 지방이 달아나고 근육만 남은 몸의 남자는 누워서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이따금 바닥도 긁었다. 욕설을 내뱉는 입에선 짜증 섞인, 동물 울음 같은 소리도 흘러나왔다. “에이 씨X…. 아빠가 화장실 가서 똥싸라고 했잖아.” 거나하게 취한 듯 그는 발버둥 치고 일어나 의미없이 몸을 기울이고 걷고 손을 뻗었다. 짧게 자른 숱 적은 머리가 순한 인상이지만 표정은 강렬했다. 영화 ‘똥파리’의 주인공 상훈을 보며 여과되지 않은 적나라함에 가슴이 먹먹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것은 억누를 수 없는 본능이었다.

지난달 29일 서울 서초동 한전아트센터 3층 연습실에서 열린 국립현대무용단 안무가 베이스캠프 오디션의 마지막 날 장면이다. 올 상반기에 열릴 안무가 김남진(43)씨의 신작에 출연할 무용수를 선발하는 자리. 김씨는 열 명의 무용수들에게 같은 동작을 따라하도록 시킨 뒤 즉흥 공연을 요구했다. 주제는 개(犬)였다. “혀를 내밀고 헥헥 거리거나 컹컹 짓는 일차적 표현만은 하지 말아 주세요.” 김씨의 유일한 주문이었다.

첫 주자 김성원(37)씨는 얼마 전 죽은 애완견을 떠올렸다고 했다. 취한 듯한 몸부림은 그때의 슬픔을 표현한 것. 하지만 오디션 자리에 참석한 무용평론가 장인주씨는 다르게 해석했다. “저 친구가 얼마 전에 아들이 생겼어요. 밤마다 울어대는 통에 잠을 잘 수가 없어 괴로움을 호소하더라구. 애 아빠가 춤을 춘다면 집안 형편은 말할 것도 없어. 왠지 그런 애환이 묻어나는 것 같네.”

한국에서 자신을 무용수라고 소개하는 사람은 최소한의 의식주에도 만족할 수 있는(혹은 견딜 수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그 춤이 현대무용이라면 더욱 그렇다. 발레는 국립발레단 유니버설발레단 광주시립발레단에 들어가면 생계 걱정은 덜 수 있다. 한국무용은 국립무용단, 그리고 대부분의 지방자치단체가 지원하는 직업무용단이 있다. 그러나 현대무용은 대구시립무용단이 거의 유일한 정규직 무용단이다. 지난해 출범한 국립현대무용단도 프로젝트마다 무용수를 선발하기 때문에 안정적 생활과는 거리가 멀다.

김성원씨의 주머니 사정이 궁금했다. 오디션이 끝나고 문 앞에서 만난 그에게 다짜고짜 지갑을 보여 달라고 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땀에 흠뻑 젖은 채 숨을 고르던 그가 슬그머니 지갑을 꺼냈다. 헐어서 너덜해진 5,000원짜리 한 장과 1,000원짜리 두 장, 그리고 교통카드. 1주일 용돈이 3만원이라고 했다. 매일 점심값 5,000원(구내식당일 경우 3,500원)에 물 한 병 사 마시면 남는 게 없다. 이날 점심엔 칼국수를 먹었다고 했다.

그는 대학에서 관광영어학과를 다녔다. 취미로 시작한 살사에 흥미를 느껴 강사가 됐고, 경기가 좋을 때는 한 달에 순익만 700만~800만원 나는 살사학원을 운영했다. 문득 발레와 현대무용에 관심이 생겼지만 식솔을 책임지려면 살사 외의 춤은 사치였다. ‘추고 싶다’는 욕망은 그러나 그를 놓아 주지 않았다. “아내의 권유 덕에 용기를 냈죠. 지금은 낮엔 현대무용단 창단공연을 연습하고, 1주일에 한 번 밤마다 살사를 가르쳐요.”

국립현대무용단 첫 안무가 베이스 캠프의 무용수 오디션은 지난달 27일 시작돼 사흘 간 계속됐다. 캠프 1기의 안무가로 선정된 김남진 김성용 밝넝쿨 이태상 정영두 최경실씨가 각각의 작품에 지원한 무용수를 골랐다. 여기서 뽑히면 3~4월 서울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열리는 안무가 6명의 신작 공연에 참여하게 된다. 지난해 가수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 K’가 전국을 강타했지만 순수예술인 무용에서 오디션은 국내에선 몹시 낯선 시도다.

지금까지 무용수들은 주로 출신 학교의 졸업생들이 꾸린 단체에서 활동하거나 친분이 있는 교수의 공연에 참가해 왔다. 무용 전공생이 아니면 춤출 무대를 찾는 것도 만만찮았다. 지방 출신은 응당 지방에 머물러야 했다. 각각 심사위원과 응시자로 만난 15년 경력의 안무가 최경실(45)씨와 9년 경력 무용수 전수진(29)씨도 처음 해 보는 오디션이 어색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오디션 첫날 우연히 오디션장을 찾은 현대무용가 예효승(37ㆍ벨기에 세드라베무용단 활동)씨는 “중요한 건 철학이고, 다른 무용수들을 만나며 새로운 체험을 하는 것”이라며 “오디션 제도 초기라 그런지 다들 움직임을 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는 것 같아요. 콩쿠르에서 느낄 법한 긴장감까지 흐르는데요”라고 말했다.

오디션은 매일 오후 5시께 시작됐다. 하지만 2시께부터 무용수들은 쭈뼛쭈뼛 대기실 앞에서 서성였다. 수수하게 차려 입은 지원자들은 모두 커다란 천가방을 둘러메고 들어왔다. 춤추기 편한 옷을 넣는 가방이다. 무대에서 조명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의 얼굴이지만 화장기는 없었다. 오로지 몸에 집중하는 이들에겐 땀이 화장품이었고, 춤이 옷이었다.

언어를 배제한 장르. 사람들은 그래서 무용을 난해하게 느낀다. 그러나 무용수들은 오히려 이 점 때문에 무용의 길을 택한 경우가 많다. 이들에겐 표정이 단어다. 근육의 떨림이 문장이다. 대기실에서 몸을 푸는 지원자들 사이에선 정적만 흘렀다. 오디션 하면 흔히 떠오르는, 개그맨이나 가수들의 왁자함은 없었다.

“춤에 몰입하는 순간이 가장 순수하다고 느껴요. 마치 종교처럼.” 둘째 날 오디션에 참가한 강소영(35)씨는 고교 시절 배운 춤을 그만두고 무병(巫病)을 앓듯 몸이 아팠다고 했다. 이화여대 중문과를 졸업하고 교육대학원 석사까지 받았지만 결국 그는 4년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에 입학했다. 집안의 반대가 심했다. 대신 병은 씻은 듯 나았다. 11년째 무용수로 살고 있는 김현정(34)씨도 오디션에 참가했다. 부산에서 아침 기차를 타고 상경한 그는 서울 무대에 설 수도 있다는 기대에 잔뜩 부풀어 있었다. 선발된다면 생업인 입시생 대상의 무용 레슨을 포기해야 한다. 그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당장이라도 (서울로) 올라올 수 있어요”라고 말했다.

국립현대무용단은 이번 프로젝트에 선발된 무용수에게 6주일 동안 180만원을 지급한다. 현대무용계에서는 전대미문의 파격적 조건이다.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고 무용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최소한을 보장해 주겠다는 취지다. 안무가 정영두(37)씨는 오디션을 보러 온 32명의 무용수 앞에서 깊게 고개를 숙이며 “3개월 동안 투신해 주세요. 6주일 이후에는 제가 어떻게든 책임지겠습니다. ‘썩어 빠진 음식을 먹느니 배를 곯겠다’라는 마음으로 무용하시잖습니까”라고 말했다. 나중에 물었다. 나머지 돈은 어쩔 셈이냐고.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무용수들과 적당한 선을 논의해 봐야죠. 안 되면 안무비에서 충당해야겠지요.”

17세기 프랑스 궁정 발레를 통해 직업 무용가가 생긴 지 300여년이 흘렀다. 하지만 이 땅에서 춤추며 먹고 산다는 건 여전히 소수에게만 허락된 일이다. 땀 범벅이 된 채 오디션장을 빠져나온 비보이 출신 오세빈(29)씨는 질문받는 걸 어려워했다. 한참 만에 천재 발레리노 바츨라프 니진스키(1889~1950)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제 삶에서 가장 훌륭한 순간은 춤추는 자가 사라지고 오직 춤만 남는 때 입니다.”

살아온 자취도, 몸의 모양도 제각각인 이들의 춤은 이렇게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김혜경기자 thanks@hk.co.kr

■ 오디션 지원자들은 누구

국립현대무용단 안무가 베이스캠프의 첫 무용수 오디션 경쟁률은 평균 5.5대 1이었다. 지원자 총 116명 중 21명을 뽑았다.

무용수들은 안무가 6명 중 자기 스타일에 맞는 한 명을 택했다. 지원자가 심사위원을 먼저 고른 셈. 안무가 정영두씨의 오디션은 13대 1이 넘는 경쟁률(40명 중 3명 선발)을 기록했다. ‘슈퍼스타 K’와 같은 오디션에 비하면 턱없이 낮은 수준이지만 지난해 9월 말 국립현대무용단이 처음 실시한 창단공연 ‘블랙박스’ 오디션 경쟁률이 3.3대 1였던 것을 감안하면 짧은 시간에 인지도가 높아진 것만은 사실이다.

남녀 성 분포는 여자 81명, 남자 35명으로 큰 차이가 났다. 국립현대무용단 제작단원 윤혜정씨는 “대학 무용과에서는 성비가 더 불균형하다”며 “남자 전공생의 경우 생계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무용을 포기하는 비율이 훨씬 높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지원자들은 대학에서 무용을 전공했다. 특히 실기 위주인 한국예술종합학교 출신(재학생 포함)은 무려 42명에 달했다. 무용학과 출신만 있는 건 아니었다. 경영학과 보석세공학과 환경화학공학과 등 춤과 연관을 찾을 수 없는 비전공생이 15명. 이 중에는 현직 연극배우와 환경단체 연구원도 있었다.

응시원서를 보니 무용전공자들이라고 해서 줄곧 춤만 춰 온 것은 아니었다. 설 무대가 없거나 경제적 이유로 뮤지컬에 출연한 무용수가 많았던 것. 보아 코요테 등 대중음악 가수들의 백댄서 출신도 보였다. 그러나 이들은 공통적으로 주역을 빛내는 Nobody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 극단 시키(四季)에서 배우로 활동했다는 정지영(30)씨는 “한국 뮤지컬에서 댄서는 가장 임금이 낮고 홀대받는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오디션의 가장 큰 장점은 지연과 학벌로부터 자유롭게 진행된다는 것이다. 3일간의 오디션에서도 당일 기차나 버스 등을 타고 상경한 무용수들이 많았다. 하지만 한 안무가는 “교수나 속한 단체 눈치를 보느라 아직 훌륭한 무용수가 덜 온 것 같다”며 “앞으로 오디션이 보편화해서 잘 맞는 무용수들과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김혜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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