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 분포하고 있는 신라무덤 가운데 광복 후 최초로 발굴된 무덤이 호우총(壺杅塚)이다. 광복이 되자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당시 김재원 박사가 인수하게 되는데 총독부박물관 책임자로 있던 아리미스(有光敎一)가 박물관 소장 유물 인계를 위해 일본으로 바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 일을 수행하고 있었다.
인수 작업이 끝나고 그 해 12월 일제식민시절의 총독부박물관이 역사적인 우리의 국립박물관으로 개관하면서 초대 관장으로 김재원 박사가 임명되었다. 그러나 아리미스는 모든 임무가 끝났는데도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한국에 더 머물러 있어야 했다. 이유는 국립박물관에서 고고학적인 유적발굴조사를 실시하고자 했지만 고고학 발굴전문가가 없었기 때문에 총독부시절의 발굴 노하우를 갖추고 있는 전문가의 코치를 받기위해 더 머물게 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아리미스는 학술발굴을 위한 인질이 된 셈이었다.
박물관을 정식으로 인수한 김재원 관장은 우선 발굴조사를 통해 우리 손으로 박물관 유물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래서 발굴 대상을 물색하는 과정에서 아리미스의 조언을 받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총독부박물관에 근무하고 있던 아리미스는 경주에서 신라 금귀거리 등 유물이 신고된 위치를 긴급 조사하여 알아 두었고 기회가 닿으면 정식으로 발굴조사를 하고자 마음먹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패망으로 기회를 접어야 했는데 광복 후 당분간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박물관 업무에 대해 초대 관장인 김 관장을 도우고 있었다. 이렇게 되어 결과적으로 아리미스의 조언을 얻어 국립박물관에서 최초로 경주의 무덤을 발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무덤이 광복 후 우리나라 고고학발굴사에 있어서 최초의 발굴조사가 되었고 발굴 후 무덤의 명칭이 호우총으로 명명되었다.
호우총은 발굴결과 도굴되지 않은, 완전한 신라무덤으로 대박을 터뜨린 발굴이 된 셈이었다. 출토된 많은 유물가운데 가장 눈길을 끈 것이 바로 뚜껑을 닫았을 때의 높이가 19.4cm인 청동호(靑銅壺)였다. 그 이유는 뚜껑까지 갖춘 이 청동제의 솥단지 밑바닥 뒤편에 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의 16자의 한자가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즉 이 유물은 고구려 정복 군주였던 19대 광개토대왕과 관련있는 유물이 분명하고 아울러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는 乙卯年(을묘년)이 새겨져 있어 일약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을묘년은 415년에 해당되고 광개토왕이 죽은 2년 후가 된다.
발굴 후 무덤의 주인공을 알 수 없어 새긴 글자 가운데 壺杅(호우)라는 글자를 따 호우총이라 무덤이름을 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유물은 동시에 우리들에게 많은 수수께끼를 안겨주었다. 왜 광개토왕을 기리는 유물이 신라의 무덤에서 발견되었는지, 어떤 신분의 사람이었는지, 제작 연대는 밝혀졌지만 만든 해에 무덤에 묻혔는지 아니면 그 후에 묻히게 된 것인지 많은 의문을 남겼다. 이와 같이 광복 후 최초의 신라무덤 발굴조사는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는 많은 수수께끼를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 이 유물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선사ㆍ고대관 고구려실에 전시되어 있다.
경기문화재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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