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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상효의 유씨씨] 영상의 가상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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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상효의 유씨씨] 영상의 가상 현실

입력
2011.01.11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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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연하면 일단 포장마차에 가야 한다. 우동 국물 같은 아주 가벼운 안주를 시켜놓지만 절대로 손대진 않는다. 가능하면 소주는 병째로 들고 마신다. 한참 마시다 보면 포장마차의 주인이 말한다. "젊은 사람이 많이 마신 것 같은데, 이제 그만 하시지" 간혹 한강 고수부지에 가서 혼자 강을 보며 병나발을 불기도 한다. 재벌 2세처럼 부유한 인물은 바에서 혼자 위스키를 마시는 것으로 대체된다. 한참을 마시다 보면 옆에 누군가 아는 사람이 와 있다. 주정은 그 사람에게 하게 된다.

현실에 없는 상투적 장면들

TV 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이 실연했을 때 보게 되는 장면들이다. 드라마 속에서 상심의 표현은 음주, 그것도 단독 음주이다. 상심이 야기할 현실의 수많은 가능성은 차단된다. 제작자와 시청자 사이에서 편하게 형성돼서 오랫동안 반복돼 온 상투적 코드들 속에서 삶은 표피적 징후들로만 박제되고 그러면서 현실에는 없는 영상적 가상 현실이 형성된다. 출생의 비밀이나, 신데렐라 스토리 등과 같은 커다란 서사 골격도 문제지만, 더욱 문제인 것은 이처럼 사소한 일상이 점점 드라마 속에서 단순화하는 것이다.

또 있다. 엿듣기는 일상화했다. 사극이든 현대극이든 엿듣기는 갈등을 만들어내는 가장 흔한 방식이다. 사극에서는 상궁이 임금의 처소도 엿듣는다. 현대극에서는 바로 뒤에 있는 사람도 모르고 그 사람의 험담을 계속한다. 현실에는 없는 장면이다. 현실의 사람들은 적어도 이렇게 쉽게 엿들어질 상황에서는 남의 험담을 절대 하지 않는다.

쉼 없이 나오는 독백도 문제다. 주인공이 부모의 묘소를 찾으면 예외 없이 긴 독백이 이어진다. 현실이라면 산 속에서 혼자 길게 중얼거리고 있는 사람은 필시 제 정신이 아닌 사람이다. 전화를 끊고도 자신의 감정을 꼭 독백으로 드러낸다.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이렇듯 혼자 중얼거리는 사람도 현실에는 많지 않다. 임신의 최초 표식은 수십 년 간 헛구역질이었고, 전화하다 상대방이 끊으면 이미 끊어진 전화에 대고 "여보세요" 3 회는 기본이다.

이유는 있다. 드라마는 영화보다 훨씬 더 많은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한다. 티켓을 구입해 영화관에 가는 관객들보다 드라마 시청자들의 집중력은 떨어진다. 10 살 아이에게도, 70 대 노인에게도 소구력 있는 이야기를 만드는 길은 가장 익숙한 코드들을 재생하는 것이다. 이야기의 길에 이정표처럼 설정돼 있는 이런 코드들은 작가에게도 시청자에게도 안정적으로 길을 찾아가게 한다. 연기자들에게도 물론 마찬가지다. 드라마는 현실이 아니고 드라마적인 현실인 것이다.

그러나 드라마는 현실을 모방할 뿐 아니라 그 모방의 결과를 다시 현실에 돌려준다. 드라마뿐 아니라 영화 게임 UCC 등의 인터넷 문화는 영상과 현실의 삶이 갖는 경계는 무너뜨리고 있다. 3D 영화나 가상현실, 상호작용적인 영상 오락물들에서는 영상과 삶은 점점 하나가 되어간다. 영상물에서의 삶을 보는 관점은 그 자체로 현실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현실의 섬세함을 담아내는 영상 스토리들은 다시 그 현실을 섬세하고 풍부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이미 현실의 삶의 모습과 연결을 잃은 영상적 현실들은 이 현실과 가상의 기민한 교호작용을 차단시킨다.

삶의 섬세하고 풍부한 모습

실연 당하면 일에 몰두하거나, 요즘 어떤 노래 가사처럼 밥을 지나치게 잘 먹을 수도 있다. 엿듣는 것보다는 차라리 묻고 대답하는 것이 좀 더 현실적인 방식이다. 임신은 이미 시험용 시약들로 간단하게 확인한다. 전화가 일방적으로 끊기면 '여보세요'를 반복할 시간에 할 말이 남았다면 다시 거는 것이 맞다. 슬프다고 강가에 혼자 나와 있지 말자. 드라마와 달리 현실에서는 음악도 없고, 아무도 보는 사람도 없다. 감기만 걸린다.

육상효 인하대 교수·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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