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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무의 선비 이야기] <68> 추사와 세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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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무의 선비 이야기] <68> 추사와 세한도

입력
2011.01.10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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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金正喜)는 경주김씨 상촌공파(桑村公派)에 속하는 19세기의 유명한 실학자이다. 그의 생부는 김노경(金魯敬)이었다. 김노경은 김노(金路), 홍기섭(洪走+己燮), 이인부(李寅溥) 등과 함께 효명세자(世明世子)의 측근이었다. 그러나 효명세자가 죽자 반대파의 공격을 받아 김노경은 고금도(古今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그 불똥은 추사에게도 튀었다.

1840년(헌종 6년) 7월10일에 대사헌 김홍근(金弘根)은 윤상도(尹尙度) 옥사를 재조사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 윤상도 옥사란 윤상도가 효명세자를 무고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 상소문을 처음 작성한 사람이 김정희였다는 것이다. 그는 안동김씨 김양순(金陽淳)이 그렇게 물고 늘어져 죽을 뻔 했으나, 친구인 조인영(趙寅永)의 조정으로 제주도 대정현으로 귀양가게 되었다.

유배생활은 고달팠다. 먹는 것도 부실하고, 풍토병이 심했다. 아는 사람들이 다 등을 돌리고 수령들이 괴롭혔다. 단지 김유근(金逌根), 권돈인(權敦仁), 이상적(李尙迪), 승려 초의(艸衣) 등과 편지를 주고받는 재미로 살고 있었다. 특히 김유근은 실세인 안동김씨 사람이기 때문에 은연중 구해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12월 17일에 김유근이 죽었다.

그런데도 역관 이상적만은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 올 때마다 귀한 책을 사다 주고, 연경소식을 전해주었다. 사례할 돈도 없었고, 다른 것으로 갚을 수도 없었다. 이에 추사는 이상적에게 세한도(歲寒圖)를 그려 보냈다. 그리고 서문을 써서 이상적의 변함없는 의리를 고마워했다. "날이 추워진 연후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에 시드는 것을 알겠다"(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라고 칭찬했다.

이 세한도는 청나라의 선진적인 화풍을 참작해 추사의 새로운 화론(畵論)을 적립한 것이라 한다. 세한도는 남종화 계통의 문인화의 극치라는 것이다. 이상적은 이 세한도를 청나라에 가지고 가 16학자들의 제영(題詠)을 받아왔다.

1851년(철종 2년)에 추사는 유배에서 풀려 용산 한강 가에 머물면서 젊은이들에게 서화를 가르치고 있었다. 이 때 제자 중에 유상(柳湘)은 이 세한도의 제영들을 베껴 썼다. 그 후 이 세한도는 이상적의 제자인 역관 감병선(金秉善)의 아들 김준학(金準學)이 가지고 있다가 1930년경에 후지쓰가(藤塚鄰)가 사서 1944년에 동경으로 가지고 간 것을 손재형(孫在馨)이 설득해 가지고 왔다고 한다. 후지쓰가는 1948년에 죽었고 그 집은 폭격을 맞았으니 천우신조라 할만하다. 그리고 후지쓰가의 나머지 추사와 관련한 문적은 2009년에 그 후손이 과천문화원 추사연구소에 모두 기증했다.

손재형은 1949년에 이 세한도에 정인보(鄭寅普), 이시영(李始榮), 오세창(吳世昌)의 발문을 받았다. 그리고 지금 세한도는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보아 세한도가 그려지고 유전된 과정은 그 자체가 19세기 조선 학예의 총화였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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