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학
지문이 반들반들 닳은
아버지의 검지는 유식했을 것이다
아버지의 신체에서 눈 다음으로
책을 많이 읽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독서를 할 때
밑줄을 긋듯 길잡이만 한 것이 아니라
점자 읽듯 다음 줄 읽고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쪽마다 마지막 줄 끝낼 때쯤 검지는
혀에게 들러 책 이야기 들려주고
책장 넘겼을 것이다
언제나 첫줄은 안중에 없고
둘째 줄부터 읽었을 것이다, 검지는
모든 책 모든 쪽 첫줄을 읽은 적 없지만
마지막 여백은 반드시 음미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유식했을 뿐만 아니라
삿대질 한 번 한 적 없는 아버지의 검지였지만
어디선가 이 시를 읽고는 혀를 끌끌 찰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이렇게 아버지의 여백을 읽고 있는 중이다
● 나도 시인의 아버지처럼, 위의 시를 검지로 밑줄 그으며 읽어본다. 그러면서 검지가 실제 글을 읽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감이나 육감 같은 익히 알고 있는 의미전달체계가 아닌 다른 의미전달체계로 글이 내게 전달되고 있는데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혀가 검지를 불러 글맛을 보고도 모르는 체 몽따는 것은 아닐까 허튼 생각들을 해본다.
이 뭐꼬! 이 시가 3연 18횡으로 된 시가 아니란 말인가. 나는 이마를 친다. 그렇구나, 이시는 연이 없는 20횡 시로구나. 시인의 깊은 마음 헤아리지 못해 연이 나눠져 있는 것처럼 보였었구나.
어디선가 이 시를 시인의 아버지가 읽는다면…, 1연과 2연, 2연과 3연 사이의 여백도 아버지의 검지는 읽을 것이다. 시인은 아버지의 검지가 음미할 여백의 미 두 줄을 포함하여, 아니 힘을 빌려 이 시를 완성하고 있구나. 갸륵한 시인의 마음이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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