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삶과 문화] 사소한 새해 소원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삶과 문화] 사소한 새해 소원

입력
2011.01.07 12:02
0 0

새해다. 섣달그믐의 태양이나 정월 초하루 태양이나 그 빛이 그 빛이건만 그래도 감회가 아주 없을 순 없다. 머리로야 해가 바뀌었다고 남북이 갑자기 손에 손 잡고 노래를 할 리도 없고, 마구 퍼지는 구제역이 딱 사라져 생매장 당하는 짐승이 한 마리도 안 생길 리 없다는 걸 잘 안다.

그러나 사람이 어디 머리로만 살던가. 머리는 그래도 마음은 '새해' 하면 기대하게 된다. 기도하게 된다. 천 조각에 묻은 얼룩에서도 신의 얼굴을 보는 것이 사람이듯, 새해니까 혹시나 하며 가슴 깊이 품었던 소원을 감히 빌어보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소원을 말하려니 머릿속이 복잡하다. 백범 김구는 일흔둘에 쓴 '나의 소원'이란 글에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라고 세 번이나 거듭 말했다. 말로만 바란 것이 아니라 그 소원을 실제로 이루기 위해 주위의 반대를 물리치고 38선을 넘었으며, 한반도에 들어온 외국군의 철퇴를 주장했다. 그러다 일흔넷 나이에 육군 소위의 손에 암살당했다. 7년 전 망명지에서 그는 독립한 조국에 돌아가 죽는 것이 소원이라 했는데, 그 말처럼 조국에서 동족의 손에 죽었다.

소원이란 이런 것, 간절한 만큼 책임이 따른다. 그러니 김구 같이 목숨을 바칠 수는 없다 해도, 모름지기 소원이라 했으면 몸과 마음으로 그를 뒷받침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럴 자신도 각오도 없이 무작정 바라는 것은 탐욕이거나 망상이지 소원이 아니다.

그래서 나도 마음 같아서는 뻥 뚫린 오존층이 말짱해지고, 세계 투기자본이 거덜 나고, 적개심을 부추기는 근본주의 신앙인들이 벼락을 맞기를 기도하고 싶지만 너무 큰 소원이라 그만두었다. 남북 협력이 정착되어 한반도에 참된 평화가 오고, 언론이 정직한 펜으로 권력을 감시하고, 사법부가 정의의 보루로 제 사명을 다하고, 부자들이 기꺼이 제 몫의 세금을 다 내고, 청렴결백한 능력자들이 고위 공직에 오르고, 4대강 사업의 삽질이 중단되고, 비정규직이 고용 안정을 요구하며 엄동설한에 철탑 위에 오르는 일 따위는 모두 사라지기를 기원하고 싶지만, 그 또한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큰 소원이다.

나는 내 주제를 안다. 내가 떠놓은 정화수 한 사발이 감당하기에 그것들은 너무 크다. 사람은 염치와 분수를 알아야 하는 법. 내 분수에 맞게 사소한 것들을 기원하기로 한다. 새해 첫날 이른 아침, 처음 받은 수돗물을 한 사발 떠놓고 두 손을 모은다.

천지신명이여, 새해엔 피자가 40분 만에 와도 그저 웃는 여유와, 1만4,000원짜리 동네치킨과 5,000원짜리 재벌치킨이 있을 때 과감히 동네치킨을 선택하는 결단력을 주소서. 종이 한 장, 물 한 바가지를 쓸 때마다 베어진 나무와 쉴 곳을 잃은 북극곰을 생각하는 소심한 상상과, 복도에서 담배 피우는 이웃에게 화내기보다 독립한 지 60여 년 만에 식민본국과 군사동맹을 추진하는 몰지각에 분노하는 큰 배포를 허락하소서. 버릇없는 아이를 욕하기 전에 그 애에게 성적만 요구하는 사회를 물려준 자신을 먼저 돌아보게 하고, 불친절한 창구 직원과 드잡이하기 전에 그를 그토록 매몰차게 만든 배후를 떠올리게 하소서.

천지신명께 비나이다. 새해에는 사소한 일에 목숨 거느라 정작 목숨 걸 일엔 모르는 척 눈 감는 비겁에서 우리를 일어나게 하소서. 그리하여 홀로 억울한 눈물 흘리는 사람이 없도록 우리 모두 울게 하소서. 서로를 위해 우는 것, 그것이 사소하지만 당찬 내 새해 소원입니다.

김이경 소설가ㆍ독서칼럼니스트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