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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 리치 스토리] 야마우치 히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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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 리치 스토리] 야마우치 히로시

입력
2011.01.07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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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닌텐도 게임기 같은 것을 만들지 못하나.”

이명박 대통령도 부러워 했던 일본 게임업체 닌텐도. 닌텐도같은 세계적인 게임업체라면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56)나 혹은 우리나라 엔씨소프트의 김택진(44) 사장처럼 정보기술에 밝은, 젊은 천재가 만들었을 것으로 생각하기 십상. 그러나 오늘날의 닌텐도를 일군 사람은 게임 엔지니어링 분야에 전문 지식이 없고, 심지어 비디오 게임도 한 번 안 해본 올해 84살의 야마우치 히로시(山內博)다.

화투회사에서 시작된 닌텐도

야마우치의 유년은 그다지 평탄하지 않았다. 1927년 태어난 야마우치는 여섯살 때부터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살았다. 야마우치의 아버지가 가족을 떠나 다른 살림을 차리면서 어머니가 그를 친정에 맡긴 것. 12살 때 교토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려고 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군수공장에서 일해야 했다. 종전 후 와세다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지만 졸업도 하기전인 22살 때 외할아버지가 사망하면서 갑작스레 닌텐도를 물려받게 된다.

닌텐도는 야마우치의 외증조부인 야마우치 후사지로가 1889년 교토에서 만든 화투 제조 회사 ‘닌텐도 곳파이(任天堂骨牌)’에서 시작됐다. 사명이 ‘하늘의 뜻에 맡겨라’라는 뜻의 닌텐도(任天堂)인 것도 이 때문. (곳파이(骨牌)는 카드를 뜻한다)

야마우치는 이후 일본 최초로 트럼프를 만드는 등 카드 제조 사업을 계속했지만 성장 가능성이 적다고 판단, 라면 제조에서 택시, 모텔 사업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세 사업이 모두 실패해 파산위기를 겪기도 했다.

그가 눈을 돌린 곳은 게임. 카드를 만들어 팔 때 구축해놓은 일본 전역의 장난감 가게 유통망을 활용할 수 있어서 였다. 63년 실내용 게임 생산을 시작하고, 69년에는 교토의 한 창고에 게임 연구개발 사무소도 차렸다. 이때 비디오게임 엔지니어 요코이 군페이(60)를 기용했는데, 닌텐도의 첫 히트작인 ‘울트라핸드’와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은 게임기 ‘게임보이’가 바로 그의 작품이다. 초반 제품의 인기는 야마우치가 사업 기반을 닦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후 최초로 카세트(소프트웨어) 교환이 가능했던 게임기 ‘패밀리컴퓨터’(83년 출시)와 휴대용 게임기 ‘게임보이’(89년) 등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하드웨어뿐 아니라 ‘동키콩’(81년) ‘슈퍼마리오’(85년) 등 게임 소프트웨어도 세계적인 인기를 끌면서 닌텐도는 빠르게 성장했다.

그러나 1994년 닌텐도는 최강의 적수를 만났다. 세계 최고의 전자업체인 소니가 게임기 ‘플레이스테이션’으로 게임 시장을 점령하면서, 닌텐도는 결국 역전을 당하고 만다. 사실 플레이스테이션의 압도적인 기술력, 화려한 그래픽에 비하면 닌텐도의 게임기는 어린이 장난감 수준이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그는 재역전에 성공한다. 단순함을 매력으로 하는 닌텐도의 게임들이 탑재된 휴대용 게임기 ‘닌텐도DS’(2004년)와, 사람의 동작을 감지하는 가정용 게임기 ‘닌텐도Wii’(2006년)로 다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 닌텐도게임기는 미국 유럽부터 아프리카 남미에 이르기까지 전세계에서 없어서 못 팔 정도가 됐다. 2008년 계속된 주가상승으로 야마우치는 재산이 78억달러에 달하면서, 마침내 일본 최고 갑부 자리에 올랐다.

넘치는 카리스마

49년 외할아버지가 사망 직전 닌텐도를 맡겼을 때 야마우치는 당시 회사에서 일하던 사촌을 해고하고, 자신만 가업을 잇는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그는 직원들을 매우 엄격하게 대하고, 직설적인 화법을 주로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완벽주의자다. 닌텐도의 바둑 게임은 다른 게임업체들보다 훨씬 늦은 2008년 8월에 처음 출시됐는데, 이는 아마추어 바둑 6단 솜씨의 야마우치가 “게임을 설계한 프로그래머가 바둑에서 나를 이길 때까지는 게임을 출시하지 마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90년대 초 걸프전으로 파괴된 이라크 바그다드의 한 폐허에서 게임보이가 발견됐는데, 외관이 심하게 망가졌는데도 게임 기능과 소리가 정상적으로 작동한 것은 유명한 일화. “게임기가 절대로 망가져서는 안 된다”는 야마우치의 완벽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 게임보이는 미국 뉴욕의 닌텐도 월드스토어 전시관에 아직도 전시돼 있다.

야마우치는 주요 의사결정 때 분석적 수치보다는 직관에 의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게임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장애물 돌파게임인 슈퍼마리오는 출시 당시 액션(격투)이나 스피드(자동차경주) 일색이었던 게임시장 트렌드와는 동떨어진 것이어서, 누구도 성공을 예측하지 못했다. 하지만 야마우치만은 히트를 예감했고, 실제로 사람들은 이 동화적 어드벤처 게임에 열광했다. 스스로 게임을 하지는 않지만, 게임의 성공을 알아보는 뛰어난 직관력을 가졌다는 게 측근들의 평가다.

야마우치는 2002년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1남2녀를 뒀지만 “게임을 잘 아는 사람이 해야 한다”며 전문경영인인 이와타 사토루(52) 현 사장에게 자리를 물려줬다.

남보라기자 rarar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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