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소녀가 으스름달만 희미한 새벽 운동장을 달린다. 얇은 운동복 사이로 쿨렁쿨렁 새들어온 삭풍이 살갗을 에자 둘은 주먹을 더 꽉 움켜쥐었다. 레슬링을 시작한지 3년, 2년째인 김지현(19ㆍ가명) 지선(18) 자매. 키 155㎝, 163㎝의 두 소녀는 보약 한 제 먹어보지 못했지만 늘 다른 선수보다 곱절로 훈련한다.
"꼭 성공해서, 뇌졸중으로 쓰러진 할머니 병원비도 벌고 아빠 호강 시켜드릴 겁니다." 가슴에 든 멍울을 한꺼번에 뿜어내기라도 하듯 안간힘을 다해 달리던 소녀들의 새벽 훈련은 2시간 가까이 계속됐다.
5일 오전 경기지역 한 고등학교 체육부 숙소 인근에서 만난 자매는 두 손을 꼭 마주잡고 있었다. 작은 몸집에 까무잡잡한 얼굴은 영락없는 10대 소녀들이지만, 눈동자에는 당찬 기운이 서려있었다. "훈련이요, 안 힘들어요. 이 악물고 하는 때도 있지만 운동하고 있으면 항상 속이 다 시원해요." 언니가 먼저 입을 뗐다.
자매는 원래 청소년 유도선수였다. 언니 지현이는 중학교에 입학하던 2005년 유도를 시작해 무서운 속도로 실력을 뽐냈다. 3년 만에 청소년 국가대표에 선발될 정도로 재능도 있었다. 동생도 언니를 따라 유도를 했다.
다정다감한 아버지는 홀로 밤낮으로 장사를 해가며 수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진 노모를 돌보고, 자매도 뒷바라지 했다. 아버지(50)는 "넉넉히 지원해주진 못했어도 딸들 키우는 재미에 신바람이 났다"고 했다.
고군분투하던 아버지가 협심증, 류마티스 관절염 등으로 쇠약해지면서 가계가 기울었다. 설상가상 자매도 슬럼프에 빠져 운동을 접었다.
자매에게 다시 희망을 안겨준 건 레슬링. 유도선수로 뛸 때 언니 지현이를 눈 여겨 본 한 감독이 꾸준히 레슬링을 권하고 용기를 주면서 새 삶이 시작됐다. 고교 입학과 동시에 도전해본 레슬링은 쉽지만은 않았다.
"기본 자세부터 모두 새로 익혀야 해 훈련도 힘들고, 절약하려고 운동복 한 벌을 동생이랑 둘이 번갈아 나눠 입기도 했지만 진짜 이 악물고 열심히 했어요. 레슬링을 유일한 희망으로 여기고." 자매는 숙소생활을 하며 훈련에 매진했고, 투병중인 아버지는 병원을 오가며 노모를 돌보고 자매를 응원했다.
"가끔 숙소에서 외박을 나와 집에 가보면 아버지는 신발이 다 닳아 헤졌는데, 병원비 아껴서 저희 운동화를 새로 사서 놓기도 했어요." 속상함과 고마움이 뒤범벅이 돼 우는 자매에게 아버지는 "절대 기죽지 말라"고 했단다.
등굽잇길을 돌아왔지만 자매는 다시 눈부신 성과를 이뤘다. 지현이는 지난해 21세 이하 국가대표에 선발돼 아시아대회 세계대회에서 입상했고, 1년 뒤 언니를 따라 레슬링을 시작한 동생도 지난해 청소년올림픽대표로 선발됐다. 지현이는 다행히 올해 한 대학에 입학하게 됐다. 그의 재능을 높이 산 대학에서 4년 장학금을 제공하기로 했다.
물론 아직 갈 길은 멀다. 지난해 훈련 도중 목과 어깨를 연결하는 신경선도 손상됐지만 참을 수 있다고 버텨오고 있다. 제 몸보다 걱정인건 자신이 떠난 숙소에 홀로 남을 동생, 투병중인 할머니와 아버지다.
그래도 지현이는 포기를 모른다. 역할모델은 골프선수 최경주다. 넉넉하지 않은 시절 훈련비 때문에 고민하고, 백사장에서 골프채가 닳도록 연습을 거듭해 마침내 세계를 제패한 모습과 장학재단을 설립해 어린 후배들을 돕는 자세를 본받고 싶단다.
"금메달을 따서 효도 많이 하려고요. 더 나중에는 훌륭한 지도자가 돼서 돈도 많이 벌고 장학재단을 만들어서 어려운 운동선수들이 맘껏 운동할 수 있게 도와줄 겁니다. '꼭' 이요." 손을 맞잡은 자매가 마주보고 웃었다.
글ㆍ사진=김혜영 기자 shin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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