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나 태풍으로 강이 범람하거나 주변이 쓸려나가면서 먼 옛날의 귀중한 유물이 출토되어 세상을 놀라게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땅속에 묻혀있는 고대 유물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발굴하지 않고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지상에 나타나 있는 흔적을 찾아 나서서 토기 편 등 유물 편을 발견하게 되면 일대가 유적지일 가능성을 지적하고 개발 등 형질변경을 통해 사전 시굴조사를 하게 된다.
홍수결과 알려진 유명한 유적 가운데 서울의 경우 한강변 암사동 신석기시대 유적과 백제의 풍납동토성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이 두 유적은 1925년 을축년 여름 네 차례에 걸쳐 한반도를 강타한 태풍으로 한강이 홍수로 넘치면서 풍납동토성의 일부가 쓸려나가고 또 암사동 강변 모래퇴적층이 쓸려 나면서 땅속 깊숙이 묻혀있던 백제시대 유물과 신석기시대 유물이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 홍수를 우리는 을축년 대홍수로 알고 있다.
이 때 풍납동토성에서 출토된 귀중한 유물 가운데 하나로 청동초두가 있다. 초두(鐎斗)는 자루가 달린 솥이란 뜻으로 자루솥이라고도 부르며 약 술 음식 등을 끓이거나 데우는 데 사용한 용기라고 알려져 있다. 풍납동에서 출토된 청동제의 초두는 홍수가 휩쓸고 지나간 뒤 토성 벽에 박힌 항아리 속에 청동거울 등 다른 종류의 유물과 함께 담긴 상태로 발견되었고, 발견자가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팔았다. 일제강점기 이 유물을 구입한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세기노다다시(關野貞)는 예사 유물이 아님을 알아 보았고 이러한 귀중한 유물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풍납토성을 백제왕성으로 보았다.
그러나 한국의 이병도박사는 이를 부인하고 삼국사기 기록상에 등장하는 사성(蛇城)으로 보았다. 사성은 원래 '배암들이' 성으로 불렸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배암들이가 '바람들이'로 변하고 이 바람들이가 한자표기로 風納(풍납)이 됨으로써 풍납토성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광복 후에도 이병도의 주장인 사성설이 설득력을 얻었지만 풍납토성의 명칭은 그대로 두고 사적 제 11호로 지정했다. 그 후 몽촌토성 발굴을 통해 이 몽촌토성이 백제왕성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1990년대 들어와 토성 내 재개발이 이루어지면서 백제시대의 많은 유적과 유물이 출토되 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1997년 당시 경당지구 재개발부지 발굴조사에서 신전으로 생각되는 특이한 구조의 유구와, 제사를 지낸 흔적인 말뼈 등 희생동물 뼈가 묻힌 장소가 발견되는 등 새로운 사실이 많이 밝혀지면서 백제왕성의 위치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지금까지 백제왕성은 몽촌토성으로 보는 견해, 하남 춘군동일대로 보는 견해, 하남시 이성산성으로 보는 견해 등 다양하지만 조사를 통해 밝혀진 결과를 보면 시기적으로나 출토된 중국제 유물 등 종합적으로 볼 때 단연 풍납토성설이 우세하여 설득력을 얻고 있다.
홍수로 우연히 발견된 중국제의 이 청동초두는 어떤 경로인지는 모르나 백제왕궁으로 들어와 왕실이나 귀족의 가정에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여겨지지만 무엇보다도 풍납토성을 한성백제의 수도인 왕성으로 볼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 중요 유물이 된 것이다. 지금 이 청동초두는 국립중앙박물관 선사ㆍ고대관 백제실에서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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