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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열규의 휴먼드라마] <18> 수복(收復)과 복학(復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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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열규의 휴먼드라마] <18> 수복(收復)과 복학(復學)

입력
2011.01.04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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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 수도 부산에서 우리들 대학생들은 전시연합대학을 다니다가 나중에는 각기 자기 대학으로 돌아가서 학업을 그나마 계속할 수 있었다. 전란 중이었다. 피난살이 하던 중이었다. 어느 모로나 경황이 없던 때였다. 부산에서 멀지 않는 낙동강 전선이 위급했다. 전쟁이 치열했다. 내일을 못 내다볼 만큼, 사태는 급박하고도 다급했다.

온 시내가 그야말로 피난민촌이다시피 했다. 초라한 행색의 난민들이 온 거리에 들끓었다. 어디 한 곳, 발붙일 데도 없어 보였다. 도시 전체가 거친 파도에 휩쓸린 배 같아 보이기도 했다.

임시 정부가 세워지긴 했지만, 난민 생활의 어려움과 혼란을 다스릴 수는 없었다. 아우성과 소란이 그치지 않았다. 지척인 전선에서는 대포 쏘는 소리, 폭탄 작렬(炸裂)하는 울림이 시내를 치고 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대학이라니!

어림 반 푼도 없는 일이었다. 그게 무슨 당치도 않는 사치냐? 그런 생각이 들만도 했다. 한데도 대학이 문을 열었다. 피난 대학이 개강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렇게 하도록 결단을 내린 정부 당국과 문교 당국의 태도며 정책은 기적과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로 나타났다. 대학마다 임시 가교사에서 문을 열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일은 그런 시대적인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대학생들은 병역이 연기되었다. 비록 UN 군이 우리를 편들어서, 참전하긴 했지만 국가의 장래가 다급한 상황 속에서 대학생으로 군사력을 높여야 할 판이었다. 한데도 굳이 그들이 군대에 당장 안 가도 되게 국가 정책으로 정했던 것이다.

그런 중에 전세는 우리 측이 우세해지고 서울이 수복(收復)되었다. 정부와 함께 대학들도 서울 본교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잃은 땅, 빼앗긴 고장을 되찾아서 돌아감이다. 나도 당연히 서울로 가야 했다. 서울 본교에 등록을 해야 했다.

부산역으로 나갔다. 사람들로 역 광장은 북적대고 있었다. 역사 안에서 바깥까지 길게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한 시간도 넘게 기다린 끝에 간신히 기차표를 끊었다. 플랫폼에 들어섰다. 승객들로 북새통이었다. 객차의 입구 문마다 인파로 버글댔다. 간신히 비집고는 안에 들어섰다. 그나마 비교적 일찍 들어 선 덕택에 간신히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이내 객차 안은 초만원이 되었다. 좌석 한 칸에 셋씩 앉았다. 그래도 자리를 얻지 못한 승객들은 좌석 옆 복도에 주저앉기도 했다. 머리 위의 짐칸은 보따리 짐으로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이렇게 해서 객차 안은 온통 사람과 짐으로 빈틈이 없었다.

야간 열차였는데 어둑한 조명 아래에서나마 다들 마음이 설레고 있음을 그 표정으로 볼 수 있었다. 그 지루하고 길었던 피난살이를 끝내고 정든 집으로, 고향으로 모처럼 돌아가는 판이라 마음이 들뜨기 마련이었을까?

'마침내 돌아 간다!' 다들 소리 없이 외쳐대고 있었다.

온 밤을 새고 기차는 서울역에 도착했다.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을 텐데도 모두들 짐 챙겨서 객차에서 내리는 몸놀림이 날렵했다. 드디어 돌아온 것이다. 귀경한 것이다. 그나마 3년하고도 두어 달 만에 되돌아 올 수 있었던 것이다.

피난민 승객마다 모두들 수복한 것이다. 지난 해 9ㆍ28 수복 60주년을 맞이했다. 광화문 광장에서는 백발의 퇴역 군인들이 참가해서는 기념행사가 크게 벌어졌다. 그런 터에 이젠 연로한 그날의 피난민들 또한 그 날의 수복을 각자 마음속으로 기념했을 것 같다. 그건 여간 큰 경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에 섞여서 서울 역사를 빠져 나왔다. 한데 당황했다. 서울 역 앞은 폐허였다. 무너진 건물 더미가 앙상했다. 역사 맞은편에 우뚝 솟아 있어야 할 세브란스 병원의 건물도 사라지고 없었다. 뿐만 아니다. 서울역 앞 천지 사방이 온통 폐허였다. 멀리로 남대문만이 남아서 외롭게 우뚝 서 있는 게 내다 보였다. 그 앞이며 뒤 그리고 둘레는 텅텅 비어 있었다.

전쟁은 그렇게 참혹했던 것이다. 시가전이 벌어진데다 공습의 폭격까지 난리를 피운 게 틀림없었다. 모처럼의 수복이 그리고 귀경이 폐허 더미에 돌아온 꼴이 되었다.

한데도 용케 다니고 있던 전차를 탔다. 다른 것 다 젖혀두고 우선 대학이 보고 싶었다. 종로 5가에서 전차를 내리고는 동숭동까지 사람들 왕래가 그다지 많지 않은 거리를 걸어갔다. 그 일대에는 전쟁의 참화가 피해 간 것같이 보였다. 나는 고향에라도 돌아가듯이 잰 걸음을 쳤다. 한참 만에 대학 정문 앞에 도착했다. 그 벽돌의 건조물은 옛날 그대로였다. 아무 변화도 없었다. 전쟁은 다른 나라 얘기 같았다.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문학부'는 건재했다. 본관, 별관 그리고 도서관 모두 언제 전쟁이 있었윰캑?듯이 말짱했다. 따로 떨어져 있는 대학교 본부도 아무 탈이 없었다. 운동장이 나를 반기고 들었다. 본관 앞의 마로니에 나무들은 사뭇 정정했다. 제법 크고넓은 그 잎새들이 싱그럽게 푸르렀다. 문을 지나서 국문과 사무실이 있던 도서관 건물 앞에 선 그 순간이다. 피다만 코스모스 곁에 국화 몇 송이가 한창이 아닌가! 나는 거기 코를 디밀었다. 그윽한 그 향기에 묻어서 그리웠던 대학이 나를 맞아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나의 수복과 나의 복학의 기념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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