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름 김무성, 일본명 가네시로 시게나리(金城茂成)
1975년 일본 교토(京都)에서 재일교포3세로 태어난 김씨는 자신을 "제2의 추성훈"이라고 표현했다. 출중한 실력에도 한국 국적과 이름을 고수해 일본에선 유도대표팀 선발자격이 주어지지 않아 98년 찾은 고국에서 더한 차별과 멸시를 겪다 결국 일본인으로 귀화해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서 일장기를 달고 금메달을 딴 동갑내기 추성훈의 삶의 궤적과 얼추 닮았다는 뜻일 게다.
시작은 비슷하다. 김씨는 교토에서 초중고교와 대학을 마쳤으나 한국국적의 '조센징'이란 이유로 취업이 쉽지 않아 한국으로 왔다. 그가 그리던 따뜻한 환대는 고국에도 없었다.
경북 의성군이 고향인 김씨의 할아버지는 1930년 일본으로 건너왔다. 김씨의 아버지는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도 불구하고 "배워야지 남의 땅에서 무시 받지 않고 살 수 있다"며 김씨에게 대학교육까지 시켰다. "어릴 땐 '나는 조선사람'이라며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다녔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현실의 벽을 실감했다"고 했다.
그는 2002년 대학(사회학 전공)을 졸업하고 취업에 나섰지만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1년 뒤 한국 정착을 위해 서울대 사회학과 대학원에 입학했다. 2005년 11월엔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의 전신인 '대한민국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원 자리도 구할 수 있었다. "자란 환경 때문인지 평소 한일관계에 관심이 많았는데 제게 딱 맞는 일을 찾아 행복했습니다. 특히 내 나라에 정착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설???"
하지만 기쁨은 잠시였다. 국무총리실 소속인 위원회에서마저 그를 '한국사람'으로 봐주지 않았다. "군대를 다녀오지 않았으니 사표를 내라"는 압력도 받았다. 결국 지난해 3월말 위원회가 활동을 종료하면서 그는 실업자가 됐다. 일을 잃은 과정이 석연치 않지만 그는 그 부분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지난해 7월 그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기대와 다른 한국생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싶었다. "세 달간 집에 머무르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을 좀 해봤어요. 그리고 생각 끝에 그래도 한국생활이 낫지 않을까 해서 지난해 11월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신묘년(辛卯年)을 고국에서 맞은 그는 새해각오를 다지고 있다. 목표는 자신과 같은 '제2의 추성훈'을 도울 수 있는 국내 단체에서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는 것이다. 아직 가시적인 성과는 없지만 한일문제 관련 시민단체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사회학 전공에다 한일 양국에서 모두 살아본 경험을 살려 한일의 청산하지 못한 역사와 양국 관계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돕는 국내 시민단체에서 일하고 싶어요.
그는 한가지 꿈이 더 있다고 했다. "국적이 떳떳한 대한민국인 만큼 한국 여성을 만나 새로운 가정도 꾸리고 싶어요."
이태무기자 abcdef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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