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이유식 칼럼] '업의 본질'을 생각한다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이유식 칼럼] '업의 본질'을 생각한다

입력
2011.01.03 12:11
0 0

한 해를 시작하는 힘찬 다짐과 약속이 봇물을 이루고 따뜻한 덕담이 넘쳐나는 때에 문득 '업의 본질'을 생각하게 된다. 2000년대의 새 10년을 맞는 시점에 우리 사회의 다양한 직업군과 정치ㆍ사회적 기구들이 공동체 내 자신들의 역할과 기능을 올바로 인식하고 그에 따른 책임과 소명, 말과 행동을 잘 판단해 잘못된 업을 쌓지 말자는 바람에서다.

'업의 본질'을 얘기할 때 으레 인용되는 사람이 있다. 20세기 초 AT&T 최고경영자를 맡아 근대 경영사에 큰 획을 그은 시어도어 베일(Theodore Veil)이 그 사람이다. 그가 CEO에 취임하던 1907년 AT&T는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라함 벨이 발명한 전화 특허가 1884년 만료된 이후 미국 전화시장에 6,000여 업체가 난립하면서 AT&T의 점유율은 50% 아래로 급락하고 품질과 가격도 악화일로였다.

AT&T 중흥 이끈 베일의 리더십

구원투수로 나선 베일은 먼저 업의 본질, 즉 전화사업의 기본원칙과 경쟁의 근간을 고민했다. 그 결과 그는 우선 전화사업의 경쟁 원천은 압도적인 통신망과 연구개발에 있다고 판단, 전미대륙을 잇는 전화망 구축과 함께 벨 연구소를 만들었다.

다음으로 그는 경쟁의 완화, 즉 망 개방이나 지분인수 등을 통한 경쟁자와의 협력에 나섰다. 망이 커질수록 경쟁력이 커진다는 '네트워크 효과'에 착안, 미국 전화시장을 AT&T 우산 속으로 통합한 것이다.

그를 위대한 경영자 반열에 들게 한 결정적 업적은 그 다음에 나왔다. 독과점에 거부감을 느끼는 정부와 대중을 이른바 '보편적 서비스(universal service)'개념으로 설득한 것이다. 산간벽지나 도서의 우편요금과 전기료가 도심과 같듯이 전화와 수도도 누구나 보편적으로 같은 가격에 혜택을 누려야 할 공공재여서 이를 위해선 자연독점이 불가피하다는 논리다. 또 독과점의 폐해가 우려된다면 적절한 규제도 감수하겠다고 선수를 쳤다. 이로써 "벨이 전화를 발명했다면 베일은 전화사업을 발명했다"는 평판과 함께 100년 기업 AT&T의 초석이 되는 벨 시스템을 완료하게 된다.

특정한 시기, 특정 기업의 사례를 일반화하는 것은 무리이지만, 위기나 문제가 닥쳤을 때 업의 본질을 꿰뚫어보며 고민하고 이해하면 해법을 찾을 수 있다는 교훈을 얻는 일화로는 부족함이 없다. 길이 어지럽거나 막히면 처음으로 돌아가라는 동ㆍ서양의 경구와도 맥이 통한다.

새해 벽두에 업의 본질을 새삼 거론하는 것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언론 노동 시민사회 등 각계 각층에서 내놓은 신년사를 보면서 느낀 소회 때문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배려 화합 겸손 존중 소통 균형 공정 상생 절제 신뢰 열정 성의 유연 변화 혁신 평화 등의 화려한 수사가 지도층의 입을 장식했다. 말만 들어도 배부르고 마음이 푸근해지는 가치들이다. 새 10년의 의미와 지향점을 새기고 대중의 공감과 동참을 호소하는 가치로도 손색이 없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정치는 불화와 독주를 일삼고 재계는 편식과 불공정을 당연시하며, 사회는 나태와 분열을 강화하고 문화는 군림과 불신을 즐겨왔다. 시민사회는 타성과 반목으로 도덕적 리더십을 잃고 종교계마저 분열과 대립을 꺼리지 않았다. 산술적 균형에 안주하거나 노골적으로 정파색을 드러내온 언론 역시 할 말이 없다.

지도층 새 10년 좌표 고민해야

그래서 그들의 신년사는 몸집만 큰 정신적 미숙아를 만난 듯 당혹스럽고 생경하다. 선진국 문턱에 다다른 국가의 지도층이라면 한 번쯤 심각하게 생각하고 반성할 법한 업의 본질에 대한 고민과 이해가 느껴지지 않아서다. 나라를 편안하게 하고 국민을 고루 살찌우며, 낙오자 없는 고른 사회를 만들고 정신을 고양시키는 문화가 풍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쏟아야 할 열정과 헌신 같은 것 말이다.

아마도 기업과 달리 그들은 헛바람만 내고 말과 행동을 달리해도 퇴출될 위험은 별로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시장과 고객도 바뀌고 있다. 업의 본질을 잊고 작은 이해에 안주하는 리더십과 조직이 무너지는 속도는 토끼의 걸음보다 훨씬 빠를 수밖에 없다.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