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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별주부 마을의 토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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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별주부 마을의 토끼해

입력
2011.01.03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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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군 원청리는 별주부 마을로 불린다. 용왕과 자라, 토끼가 펼치는 별주부전(鼈主簿傳)의 무대가 바로 이곳이다. 새해를 맞으러 원청리에 갔다. 신묘년 토끼해를 맞는 장소로 제격일 듯싶었다. 인파가 몰려 고생하지 않을까 하였지만 기우에 불과했다. 마을이 잘 알려지지 않은 데다 혹한에 구제역이 겹쳐 인적은 드물었다. 눈 쌓인 해변에 살을 에는 눈보라만 쌩쌩거린다.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맨 처음 찾아 간 곳이 해변 자라바위다. 토끼를 등에 태우고 자라가 육지에 올라오자 토끼는 훌쩍 땅에 뛰어 내리더니 "간을 빼놓고 다니는 짐승이 어디 있느냐"고 놀리며 숲으로 달아난다. 자라는 속은 것을 탄식하며 용왕을 향한 채 죽는다. 죽은 자라는 바위가 되었는데, 둥그런 모양이 자라를 닮았다. 바위 옆에 이름 없는 석공이 만든 토끼와 자라의 화강암 조각이 있다. 웃는 표정에 익살이 넘친다.

궁 앞(宮前)이라 불리는 곳에 묘샘이 있었다고 한다. 토끼가 용왕에게 "간을 떼어 청산녹수 맑은 샘에 씻어 감추어 두고 왔다"고 했던 그 샘이다. 지금은 경지정리 사업으로 샘은 없어지고 표지석만 서 있다.

용새(龍塞)골은 자라가 용왕의 명을 받아 처음 육지에 도착한 곳이다. 근처에 노루 꼬리를 닮은 노루미재가 있다. 토끼가 자라를 놀리고 사라졌다는 숲이다. 눈밭 위에 실제로 산토끼 발자국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별주부 마을에서 설화의 흔적을 찾다 보니 작고 힘없는 토끼가 수궁에서 살아나온 재치에 새삼 탄복하게 된다. 토끼는 항상 꾀를 부려 강한 자를 물리친다. 가까스로 뭍에 오른 토끼는 낮잠을 자다 독수리에게 채이자 굴속에 두고 온 보물주머니를 주겠다고 꾀를 부려 살아난다. 다른 민담에서는 호랑이가 잡아먹으려 하자 얼음물에 꼬리를 담가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고 속여서 호랑이를 얼어 죽게 만든다.

꾀보 토끼는 약자를 대변한다. 우둔한 호랑이에게 담뱃대를 물려주며 대등한 위치에 서거나 힘센 호랑이를 골리는 토끼의 모습은 양반과 평민의 사회적 관계를 해학으로 극복하려 했던 서민들의 염원을 담고 있다.

마을회관 언덕길에서 주민들을 만났다. 해마다 음력 정월 14일에 자라바위 앞에서 용왕제를 지내니 꼭 보러 오라고 한다. 다른 지역의 용왕제가 풍어와 뱃길의 무사함을 비는 데 반해 원청리는 토끼가 용왕을 우롱하고 수궁을 도망쳐 나온 것을 빌며 용왕의 건강을 기원한다고 한다. 설화를 현실에 끌어들인 주민들의 해학이 별주부전 토끼의 넉살에 뒤지지 않는다. 원청리 용왕제는 별주부 마을과 더불어 테마관광 소재로 개발해야 할 소중한 지역 문화유산이다.

토끼는 우리 시대에 가장 잘 어울리는 캐릭터다. 미래학자 존 나이스비트는 "21세기는 여성(Female) 감성(Feeling) 상상(Fiction)이 주도하는 3F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예견한 바 있다. 맹수의 먹이감인 나약한 토끼는 재치로 위기를 벗어난다. 달 속 계수나무 아래서 천연덕스레 방아를 찧는 감성의 소유자이면서 어떤 위기에도 위축되지 않고 풍부한 상상력을 발휘한다.

별주부 마을 자라바위에 올라 유달리 시름이 많았던 검푸른 서해 바다를 바라본다. 기름유출 재앙이 채 치유되기도 전에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도발이 연이어 발생했다. 2000년대 들어 한반도의 가장 큰 사건이 모두 서해에서 벌어진 것이다. 새해에는 서해 바다의 시름이 말끔히 걷히고 토끼의 지혜로 이 땅에 평화가 정착되기를 기원한다.

전강옥 조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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