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 아드님 앞으로 병무청에서 등기 하나 왔어요. 나와서 확인해주세요."
"날 풀리면 오든가 하지, 이 추운 날 뭐 하러 와."
30일 오후 꽁꽁 얼어붙은 가파른 오르막을 기다시피 오르자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달동네 개미마을이 나타났다. 눈 덮인 마을은 개 짖는 소리만 요란할 뿐 인기척이 없다. 비탈진 계단 곳곳에 철로 된 찌그러진 대문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고요했던 골목 틈새로 반가운 대화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동네 곳곳에 생기가 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우편집배원 서영훈(36)씨. 8년째 개미마을에 제일 먼저 소식을 전하고 있다. 지금은 눈을 감고도 집을 찾지만, 처음에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산 언덕에 지어진 개미마을은 주택들이 상하좌우 구분 없이 아무렇게나 들어서 있고, 굽이치는 골목이 미로처럼 얽혀있다. 200가구에 약 400명이 산다. 대부분이 노인들이고 저소득층이다. 그러다 보니 언제나 희망이 메말라 있다. 모습을 보일 때마다 서씨가 반가운 이유이기도 하다. 얼마 전 지병이 있는 한 60대 할머니는 서씨가 배달한 소포를 받고는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독일에 있는 친척이 보내준 약이었는데 배편으로 부치다 보니 한 달 만에 도착했다.
주민회장 오한석(79)씨는 이날 서씨에게 물 한잔을 가득 채워 건네며 "추운 데도 이렇게 열심히 찾아와주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인데 세상 어떻게 돌아가는지 얘기도 해주는 말벗 노릇까지 해준다"고 했다. 동네어귀 구멍가게에서 만난 주민 박모(68)씨는 "산동네라 배달하기 불편할 텐데도 젊은 사람이 인상 한 번 안 쓰고 편지를 가져다 줘요"라며 "늘 친절하고 싹싹하게 어른들한테도 잘해서 아들보다 더 든든한 사람이야"라고 서씨를 추켜세웠다.
그는 외롭고 가난한 이에게 언제나 희망의 전령이고 싶지만 나쁜 소식을 전할 때가 많다. "가압류 통지서 같은 나쁜 소식을 전할 때면 저한테 고함을 지르는 등 화를 내는 이도 있어요. 몇 해전부터 경기가 안 좋아지면서 새로 이사온 분들은 아무래도 여유가 없다 보니 말에도 가시가 박혀 있죠."
사실 처음 이 구역을 맡게 됐을 때는 골목골목 미로나 다름없었고 불편함은 말할 수 없었다. 무허가 주택이 많아 주소가 아니라 이름으로 집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네 사람 이름을 모조리 외우고 족보를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이날처럼 폭설이 쏟아진 때는 낭패다. 미끄러져 넘어지는 것은 다반사, 지난해 가파른 빙판길에서 오토바이를 몰고 가다 넘어져 어깨를 심하게 다친 적도 있다.
하지만 주민들의 물 한잔, 따뜻한 말 한 마디가 이 모든 것을 녹였다. 그는 "집배원 지역조정을 해마다 하는데 이상하게 3번 연속 개미마을로 정해졌다"며 "이곳 주민들과 쌓은 정이 운명이 된 모양"이라고 웃었다. 때로 주민들은 빠듯한 형편에도 서씨에게 실적을 높이라며 보험에 가입해주겠다고 나서기도 하고, 어서 내려가라며 대신 우편물을 맡아주기도 한다. 서씨는 "해드리는 것도 없이 제 일을 할뿐인데 따뜻하게 맞아주시는 어르신들 덕분에 힘이 난다"고 했다. 또 "굳게 닫힌 아파트 대문에 편지를 넣는 것보다 전화고지서라도 골목 끄트머리에서 목 빠져라 기다리는 이웃을 만나는 일이 힘들더라도 훨씬 보람 있다"고 덧붙였다.
오후4시 배달을 시작한 지 꼬박 2시간째. 이날 배달한 편지는 약 400통. 일을 마칠 무렵 찬바람에 이미 얼얼해진 서씨의 볼에 따뜻한 미소가 번졌다. 새해소망을 물었다. "이곳 사람들이 웃을 수 있는 좋은 소식이 담긴 편지를 많이 가져다 주는 거요. 그리고 저도 가족들과 8년간 단 한번도 가지 못했던 여행을 가보고 싶어요."
강지원기자 styl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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