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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남의 입장도 생각해야지요"

입력
2010.12.31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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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버스를 타고 출근하다 색다른 경험을 했다. 버스는 좁은 길에서 큰 길로 나오면서 바로 전용중앙차선으로 진입하는데, 그러다 보면 좁은 길에서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 보통 기사들은 별 생각 없이 정차하여 기다리는데 그러면 뒤따르던 택시들이 어김없이 빵빵거리며 재촉한다. 얼마 전 어느 기사가 차선 한 쪽 불편한 곳에 비켜서서 중앙차선 진입이 용이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승객들은 잠시 의아해 했으나 뒤에서 빵빵거리는 승용차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상황을 곧 이해하게 됐다. 비슷한 시간에 출근을 하니 같은 버스기사를 종종 만나게 되는데 그는 항상 그렇게 비켜서서 기다렸다. 엊그제 폭설로 모두가 분과 초를 다투는데도 그는 여전했다. 모르는 척하며 왜 여기서 기다리느냐고 물었다. 그는 묻는 사람이 이상하다는 듯 대답했다. "택시 입장도 생각해 줘야지요."

배려하는 마음을 보는 유쾌함

그 다음날까지 그 기사를 생각하며 유쾌했다. 시내버스 제도가 개편되고 버스전용차선이 생기면서 버스기사와 택시기사 사이의 갈등은 간혹 적개심의 차원까지 번지기도 한다. 유사한 갈등과 적개심이 사회 전반에 얼마나 넓고 깊게 확산돼 있는지, 대한민국 국민 가운데 이를 느끼지 않은 사람이 없을 터이다. 위로는 청와대나 여의도에서부터, 멀리는 산사(山寺)나 교회에까지, 그러다 보니 계층과 장소를 불문하고 도처에서 '빵빵거리는 소음'이 높아지고 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이 참 좋다. '자리를 바꿔서 그것을 생각한다'는 뜻의 한자어지만 중국에서 사용하는 고사성어나 사자성어는 아니다. 우리말로 굳어졌는데, 옛 중국 문헌에 근거가 있기는 하다. 사서(四書) 가운데 있는 '역지즉개연(易地則皆然)'이라는 말이 우리나라로 와서 진화한 듯하다. 맹자가 3명의 제자를 평하면서 "첫째는 누추한 곳에 살며 청빈한 생활을 했고, 둘째는 물에 빠진 백성을 보면 자신이 물을 관리하지 못했다고 여기고, 셋째는 굶주리는 국민에게 자신이 일을 잘못한 때문이라 말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서로 처지가 바뀌어도 모두 그렇게 했을 것(역지즉개연)"이라 칭찬했다. 맹자의 '역지즉개연'보다 우리의 '역지사지'라는 말이 훨씬 나아 보인다.

여느 해라고 크게 다르지 않겠지만 2010년엔 유난히 '제 입장만 챙기느라 상황을 그르치거나 어렵게 만든 일'이 많았다. 처음엔 빵빵거리는 소음으로 시작됐으나 결국엔 멱살잡이와 주먹다짐으로까지 이어졌다. 일일이 열거할 필요도 없이 엊그제 일이어서 여전히 기억에 생생한 것만 해도 부지기수다. '통큰치킨'이나 '쥐식빵' 등도 상대방의 입장을 조금만 생각했어도 그렇게 되진 않았을 터이다. 여의도 정치권 모습이나 현재의 남북 긴장상황에까지 생각이 미치면 안타까움은 더하다.

우리의 선현들이 만들어 낸 역지사지의 참뜻을 다시 생각한다. 내가 너의 입장을 생각해 주었으니 그만큼 너도 나의 입장을 생각해 줘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전혀 다른 얘기다. 그것은 거래나 협상의 기술이고 전제일 뿐이다. 앞의 버스기사 얘기에서 그가 뒤에 있는 택시도 똑같이 앞선 버스의 입장을 생각해야 한다고 요구한다면 갈등과 적개심 해소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터이다. 역지사지는 '좀 더 강한 자, 좀 더 가진 쪽, 좀 더 풍족한 세력'이 '약한 자, 없는 쪽, 부족한 세력'에 대해 가져야 할 다소 일방적인 마음을 지적하고 있다.

'역지사지'는 사회구성원 의무

택시도 버스 입장을 생각해라, 소상인들도 대기업의 입장을 생각해라, 소수당도 다수당의 입장을 생각해라, 북한도 남한의 입장을 생각하라고 거듭 요구한다면 역지사지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기 때문이다. 새해 첫 날 굳이 이 말을 꺼낸 것은 지난해 수많은 갈등이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없어서 생겼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역지사지는 인간적 덕목에서 나아가 공동체 구성원이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다.

정병진 수석논설위원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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