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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대 2학년 노희진씨의 힘겨운 세밑/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새해 맞고 싶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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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대 2학년 노희진씨의 힘겨운 세밑/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새해 맞고 싶지만…"

입력
2010.12.30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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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인간인 여동생(15)이 아동학대 사례로 신고 받았을 때, 기분이 어땠을 것 같으세요."

오히려 그는 되물었다. 가녀린 몸에 긴 생머리, 고운 얼굴이건만 목소리는 다부졌다. 가슴 속 응어리를 꾹 눌러 담는 게 몸에 밴 듯 차분했다. 29일 어둠이 내려앉는 서울 서대문구 신촌의 유명사립대 기숙사는 노희진(21)양이 홀로 지키고 있었다. 방학을 맞아 연말연시를 가족과 보내려고 떠난 학생들의 빈 자리가 더 적막했다.

"6개월 넘게 집에 못 갔어요, 새해니까 가고 싶죠. 근데 두 개 하는 과외가 밀렸거든요." 과외 일정을 좀 뒤로 미루면 되련만 그는 이미 귀성(전남 순천시)을 포기했다. "안 하면 생활비가 한 푼도 없어요. 아버지께 돈도 못 보내드리고. 저번에 과외가 끊겨서 한 달 넘게 라면만 먹고 살았는데…." 그는 당시 기억이 떠오르는지 고개를 흔들었다.

지난달 그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동생이 가족에게 학대당하고 있다"는 신고가 들어왔다고 했다. "동생 병원비가 1,000만원 가까이 연체되면서 주변에서 신고를 한 거 같아요." 그때도 그는 동생 곁으로 갈 수도, 선뜻 나서 누군가에게 해명도 할 수 없었다. 순순히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투병 중이고 저도 여의치 않고, 복지센터 직원이 방임이 인정되면 병원에서 무료로 진료받을 수 있다고 해서…. 미안하죠, 정말." 그는 한동안 고개를 숙였다. 그 심란한 상황에서도 그는 학업과 과외를 놓지 않았다.

명문대 영어영문학과 2학년인 희진양은 학벌만 따지면 남부러울 게 없다. 그러나 그에게 대학생활은 '전쟁'이자 '생존의 몸부림'이다. "성적이 떨어져 장학금을 못 받으면 남들은 그러려니 하겠지만 저는 대학을 아예 포기해야 해요." "목숨 걸고 공부한다"는 그의 말이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 그의 성적은 평균 A-이상인 학점 3.75(만점 4.3)를 유지하고 있다.

아버지는 희진양이 고 2때 간암 판정을 받았다. 이미 그 전에도 희진양 가족은 기초수급대상에 속해 매달 40만원의 정부지원에 의존해 살았다. 동생은 네 살 때 뇌병변 장애를 얻어 식물인간이 됐다. 10년째 의식이 없어 의료기기에 의존해 겨우 생명만 유지하고 있다. "잠깐 한눈 파는 사이 동생이 물 웅덩이에 빠졌어요. 식구들 모두 죄책감이 있어요."

갑자기 찾아온 비극은 가족의 평범한 생활을 앗아갔다. 동생의 병원비가 많이 들자 희진양의 부모는 적금을 깼고, 전세에서 월세로 집을 옮겼고, 결국 희진양이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엔 동생을 집으로 데려와야 했다. "엄마가 동생 코에 끼워진 호스로 미음을 넣어 먹였는데, 건더기가 하나라도 있으면 안 돼 정말 잘 갈아야 하거든요. 동생 음식 준비하려면 반나절이 걸렸어요." 그리 정성을 기울였지만 차도는 없고 빚만 늘어갔다.

먹고 사는 건 팍팍했지만 희진양은 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내세울 수 있는 게 좋은 대학 가는 것밖에 없다고, 그게 우리 가족에겐 최선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흔한 학원 한번 가본 적 없고, 문제지 살 돈도 없었다. 학교 도서관에서 혼자 공부했다.

2008년 12월13일, 그토록 고대하던 대학 합격 소식을 받은 그 날짜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서로 눈물을 보이지 않는데, 그날은 부모님과 함께 얼마나 울었는지, 그것도 슬픔이 아니라 기쁨의 눈물이잖아요. 생생해요."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희진양의 동생은 작년 3월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다. 어머니가 집에서 홀로 간호한지 꼬박 6년만이었다. 그새 형편이 나아진 것도 아닐 텐데, 희진양이 잠시 망설였다. "동생의 상태가 악화하기도 했지만 엄마가…." 겨우 말을 이었다. "제 옆에 가족은 이제 아빠랑 동생뿐입니다."

희진양은 교사가 되기 위해 교직 과목을 부전공으로 이수하고 있다. 그게 최선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사실 제 꿈은 뮤지컬 배우가 되는 건데, 고등학교 때는 연극부도 하고 그랬는데, 그런데 이제는 잘 모르겠어요"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희진양은 겨우 다른 학생들이 하숙비에 쓸만한 돈(정확한 액수는 밝히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을 과외로 벌어 자신의 생활비에 쓰고, 아버지에게도 보낸다. 그러면서 꼬박꼬박 매달 10만원씩 저축을 한다. 2년이나 됐지만 사실 잔고는 거의 없다. 그래도 계속하는 이유는 3가지나 있다.

①과외가 떨어질 때를 대비해야 한다(전에 호되게 당한 적이 있다)

②토플(응시료 20만원 정도) 시험을 봐야 한다(영어영문학이 전공인 그는 지금껏 한번도 토플을 본 적이 없다)

③집에 내려갈 때 아빠랑 동생에게 선물을 사야 한다

희진양이 두 손을 꽉 모았다. "아빠한테는 털 달린 스웨터, 동생에겐 따뜻한 내복을 사주고 싶어요. 늦어도 설엔 집에 가야죠. 내년엔 '그냥' 모든 게 다 잘됐으면 좋겠어요. 아빠도, 동생도, 저도." 잠시 누려보는 새해소망 덕인지 희진양의 낯빛이 밝아졌다.

후원문의 어린이재단 전남지역본부 (061)753-5129

김현우기자 777hyunw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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