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내 어머니와 잠자리를 같이 하고 만인이 혐오하고 공포 속에 바라볼 자식들을
낳을 것이라고. 또 내가 내 아버지를 살해하리라고.” 자신의 운명을 저주한 태양신의 신탁을 떠올리며 오이디푸스가 뇌까린다. 산고 끝에 재단법인으로 거듭난 국립극단의 첫 작품으로 선택된 ‘오이디푸스’가 왜 희랍 비극의 정점에 있는지를 압축해 보여주는 대목이다.
극단 물리 대표이면서 국립극단 상임연출을 겸하는 연출가 한태숙(61)씨의 총체적 무대언어가 폭발하는 작품이다. 희랍 비극에 대한 한태숙 식 오마주는 그의 대표작 ‘레이디 맥베스’보다 격하다. 첫 그리스 비극에 거는 기대로 그의 마음은 뜨겁다. “60 넘으면 꼭 하리라 마음먹어온 작품이다.”
운명의 힘에 내맡겨진 인간 존재의 불안은 곧바로 배우들의 육체언어로 거듭난다. 때로 벽에 매달리기도 하며 그들은 2,500년 전의 시인 소포클레스의 언어를 차곡차곡 길어올린다, 원일씨의 풍성한 타악은 그 여백을 채운다.
1998년부터 극단 물리의 ‘레이디 맥베스’를 함께 만들어 온 이영란씨는 이번 작품에서 화가로 거듭나 연출가 한씨의 의도를 또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다. 무대에 드리워진 길이 9m의 철벽을 화폭 삼아 분필 등으로 그리스 시민을 상징하는 사람을 그리고 지운다. 그가 제시했던 새로운 연극 개념인 물체극의 또 다른 모습이다. 분필 등 그림의 재료는 강렬한 질감을 내기 위해 특별히 제작됐다.
컴퓨터그래픽이나 스크린이 일반화된 세상에서 아날로그적 가치에 거는 한씨의 신뢰는 견고하다. 이 무대가 국내 그리스 비극 수용사에서 굵은 획을 그을 것으로 전망되는 이유다. 한씨에 의하면 희랍 비극이 “화려한 응집력을 달성한 심리극”으로 거듭나는 순간이다. 그는 “지난해부터 나를 괴롭혀온 다발성골수종을 달래가며 해 온 작업”이라며 “특히 원로와 시민 등 코러스를 잘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배우들의 오디션을 일일이 주관, 성에 안 차면 다시 섭외하기를 지난 8월 이래 모두 3차례. 그는 “인간의 본질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라 국립극단 창단작으로 제격”이라며 “국립극단의 우수한 인적, 물적 자원으로 이뤄낼 큰 무대”라고 말했다.
거듭된 오디션만큼이나 타이틀 롤에 거는 기대가 각별하다. “이상직씨를 주목해 달라”고 한씨는 요청했다. “속이 보일 정도로 투명한 배우예요.” 희랍 비극하면 으레 떠올리는 압도적 남성성으로부터 멀찌감치 있다는 것. “국립극단이 해체된다는 소문이 나돌던 때 농사 짓겠다며 구례에 내려가 있던 사람이죠.”
티레아시스의 박정자, 크레온의 정동환, 요카스타의 서이숙씨 등 그 밖의 주역급 배우들도 빛날 무대다. 한씨는 “철판에 올라가 매달리다 보니 배우들이 무릎 까지기는 보통”이라며 “너무 괴롭혀 미안한 마음”이라고 말했다. ‘오이디푸스 왕 풀어 읽기’ 등의 저자인 강태경 이화여대 영문과 교수의 번역과 드라마트루그 작업은 무대를 지금 이곳에 바짝 끌어당긴다.
내년 1월 20일부터 2월 13일까지, 명동예술극장. (02)3279-2233
장병욱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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