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되, '전시연합대학'이라니? 그게 어떤 대학일까? '전시'는 뭐고 '연합대학'은 또 뭘까? '전시연합대학'은 6ㆍ25 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부산에 한때 잠깐 있었던 대학이다. 전쟁을 하는 시기에 여러 대학이 연합해서 만든 한 단위의 대학이란 뜻을 '전시연합대학'은 갖추고 있다.
전쟁을 당하고는 서울에 있던 여러 대학들이 일단 부산으로 피난을 오긴 왔다. 대학별로 부산 시내에 달랑 작은 집을 빌려서는 사무실을 차렸다. 학생들 등록을 받긴 했지만, 그 수가 워낙 적었다. 또 교사는커녕, 강의실 한 칸도 없었다. 그래서는 연합대학이 이룩되었다. 피난 온 전 대학이 하나로 뭉친 것이다. 그래서 '전시연합대학'이란 간판을 내걸게 되었다.
부산 시내의 작은 극장 하나를 빌렸다. 영화 상연을 하지 않는 아침과 낮 시간에만 100 명도 못 될 학생들이 극장 의자에 앉아서는 '합동강의'라는 것을 청강했다. 과목 별로 교수 별로 따로 강의를 설정할 수는 없었다. 강의실이라고는 극장 안의 관람석, 그 단 하나의 공간이 전부였으니, 학생마다의 학부며 학과며 전공이며 그런 걸 구별해서 강의할 처지가 못 되었다.
난 데 없이 대학 강단으로 변한 극장의 관중석! 전면의 허연, 널따란 영사막 앞의 높은 기단에 탁자가 놓였다. 그 옆에 흑판이 제법 안존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게 강의실 설비의 전부였다. 나이든 교수는 영사막 앞을 오락가락하면서 강의를 했다.
꼭 무슨 배우 같아 보였다. 그런 어설프기 이를 데 없는, 임시 강의실에서 강의가 진행되었다. 그럴듯한 제목을 내건 교양과목, 누가 들어도 어려울 것 없는 교양 과목을 전체 학생이 합동으로 들었다. 대개는 그저 고만고만한 개론 수준의 과목들이었다.
그러다가 부산 영도의 외딴 한쪽에 있던, 아주 낡은 엉성한 창고를 빌려서는 칸을 지르고는 벼락치기로 강의실을 만들었다. 나무나 볼품이 없었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초라했다. 바로 지척의 바닷가 비탈에는 피난민들의 소위 '하꼬 방' 집이 옹기종기, 다닥다닥 무리를 이루고 있었는데, 그 모양새와 전시연합대학은 잘도 어울려 보였다. 누가 보아도 서로 사촌 간으로 보였을 것이다.
소문을 듣고 모여든 축들까지 해서 학생 수가 조금 늘어났다. 세 칸인가 되던 강의실에서는 각기 다른 과목의 강의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강의는 여전히 교양과목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전공이 다르고 학년이 다른 학생들, 누구라도 알아들을 만한 내용이었다.
그게 한 학기 동안 지탱되었다. 물론 시험도 치고 논문을 제출하고 해서는 학점도 딸 수 있었다. 어려울 것 추호도 없었다. 강의 수준이며 내용이 그저 그렇고 그랬으니 시험도 논문도 누워 떡먹기였다. 그러기에 학점도 강의 시간에 나가 앉아 있는 것 말고는 공짜로 얻는 것이나 별로 다를 것 없었다.
입학하자마자 6ㆍ25 전쟁이 터졌다. 불과 일주일 정도 강의를 들은 것밖에 없었다. 그게 신입생으로서 서울에서 가진 학력의 전부였다. 그러니 부산 전시연합대학의, 가을학기에 딴 학점이 대학생으로서 최초로 얻어 낸 것이었다. 한데 그게 불로소득이나 다를 것 없었다. 강의 내용마저도 별로 볼품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려나 그렁저렁해서는 부산 전시연합대학은 달랑 한 학기 하고는 문을 닫았다. 온 세계를 통틀어서 문 연 지 한 학기 만에 문 닫고 폐교한 대학이 또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러나 나의 학력(學歷)과 이력(履歷)에서 부산 전시연합대학 1학년, 한 학기, 그것은 지울 수가 없다. 6ㆍ25 전쟁이 이 겨레의 역사에서 차지하게 될 막중한 비중만큼, 내 개인의 역사에서 부산 전시연합대학이 차지할 비중은 결코 적다고 할 수는 없다.
대학생으로서 겪은 첫 학기라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전쟁에 휩쓸린 혼란과 고난 속에서 그나마 명색이라도 대학이 문을 열었다니! 그것은 한국의 대학의 역사에서 길이 기념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 민족의 일대 비극, 6ㆍ25 전쟁사의 일부로 기록되어 마땅할 것이다. 그것은 전란(戰亂)의 소용돌이 속에서 피어난 꽃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한데 이듬해 봄 학기부터는 전시연합대학은 해체되고 각 대학 별로 강의를 하게 되었다. 종합 대학에서는 단과대학 별로 그랬었다. 내가 다니던 대학은 그 당시 부산의 동대신동에 있던 부산대학교의 강의실에 세를 내어서 개강했다. 그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근처의 산비탈에 초라한, 작은 가교사를 지어서 비로소 딴 살림을 차릴 수 있었다. 교무과의 사무실이고 강의실이고 간에 천막집이었다. 바람이 제법 세차게 불면 온 강의실 안이 흔들렸다.
그런 지경으로 강의가 진행되었다. 한데 종교학 개론 시간이다. 교수는 어두컴컸?천막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우리는 산비탈로 올라갔다. 구덕산이라고 하는 제법 높은 산의 중턱이었다. 나무도 별로 없는 황량한 풀밭이었다. 햇살이 따가웠다. 느닷없는 노천 강의실이 차려진 꼴이었다.
강의가 시작되기 전에 종교학을 전공한 교수는 다 함께 기도하자고 했다.
"주여! 거친 풀밭입니다. 하지만 그런 터전이기에 우리는 더욱 열심히 강의하고 학습하고 할 것입니다."
그 당시 기독교 신도가 아니던 나는 나도 모르게 합장을 했다. 고개를 깊이 숙였다. 풀밭 강의실의 풀 냄새가 향기롭게 일면서 더 열심히 하자는 나의 마음의 다짐을 돋우어 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 자리의 동료 학생들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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