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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묵은해와 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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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묵은해와 새해

입력
2010.12.28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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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은해니 새해니 분별하지 말게/겨울 가고 봄 오니 해 바뀐 듯하지만/보게나 저 하늘이 달라졌는가/우리가 어리석어 꿈속에 사네"

해가 바뀌는 연말연시가 되면 생각나는 이 선게(禪偈)는 한 해를 분주하게 보내느라 지친 마음을 일깨운다. 1990년대 중반쯤에 한국일보 지면에 실린 어느 칼럼에서 이 게송(偈頌) 을 처음 접하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때 칼럼의 필자는 게송에 감명을 받았지만 쓴 사람이 누군지는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 후 몇 년 지나 만난 소책자에서 게송의 임자가 조선 말 선농일치(禪農一致)로 이름 높았던 학명 선사(鶴鳴 禪師)라는 것을 알고, 이런 게송이 나오는 경지는 어떤 것일까 궁금해 했던 적이 있다.

연말 송년회를 여러 해 치르다 보니 사실 묵은해와 새해의 구별이 별로 실감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선사가 말하는 것처럼 꿈에서 깨어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상에 매몰돼 취생몽사(醉生夢死)나 다름없는 흐리멍덩한 상태인 것 같다. 내년도 올해와 그다지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저 경험적으로 느끼고 있을 뿐이다.

선가(禪家)에서는 분별을 내려놓으라는 말을 많이 한다. 이것과 저것을 나누어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고 헤아리는 상대적인 시비 분별을 그만두라는 가르침이다. 세상에서 하는 것처럼 알음알이로 따져보고 판단해서는 오히려 방해만 될 뿐 참 공부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번잡한 세속을 살아가면서 분별을 하지 않고 견딜 수 있는 재간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돌이켜보니 올해도 분별을 참 많이 했던 것 같다. 개인적인 일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를 뒤흔든 여러 사건들이 분별을 하지 않고는 도저히 지나갈 수 없게 했다. 특히 4대강 살리기 사업이나 북한의 연평도 도발같이 나라를 뒤흔든 큰 사건들을 두고 양 극단으로 쪼개진 여론은 분별의 극치를 이뤘다.

사건이 전개되어 가는 고비마다 그렇게도 많은 시비와 판단, 비난과 지지가 뒤따랐다. 무슨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비판을 위한 비판, 지지를 위한 지지에 불과한 것도 많았다. 잘 살펴보면 먼저 각자가 처한 입장에 따라 어떤 분별이 있고 이 분별을 고집해 또 다른 분별을 하면서, 분별이 점점 더 쌓이고 쌓여 대립과 갈등이 깊어진 것 같다. 분별의 바람이 얼마나 거셌던지 선가의 맥을 잇고 있는 곳에서마저, 그것이 정당하다 하더라도 무슨 예산 따위의 문제를 들어 누구는 절에 못 들어온다고 분별심을 내고 말았다.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면서 해대는 분별이 꿈에 불과하다는 선사의 경지는 짐작하기조차 쉽지 않지만, 어쨌든 잠시라도 세상에 대한 분별을 내려놓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공부나 일도 중간에 휴식이 있어야 더 잘할 수 있듯이, 분별도 잠시 쉬고 나면 좀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어차피 내년에도 또다시 맹렬하게 분별을 하지 않을 수 없을 테니, 그저 해 바뀌는 것을 핑계 삼아 며칠만이라도 마음을 쉰다 생각하고 분별을 하지 않는 여유를 가질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조선 말 선풍을 크게 일으킨 경허(鏡虛) 선사의 게송이다.

"무엇이 거짓이고 무엇이 참인고/참이고 거짓이고 모두 다 헛것일세/안개 걷히고 낙엽진 맑은 가을날/언제나 변함없는 저 산을 보게"

남경욱 문화부 차장 kwna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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