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막을 걷어라"로 시작하는 노래 '행복의 나라로'는 1970년대 초의 어두운 시대와 어울렸다. 창문을 열고 춤추는 산들바람을 느껴보고, 가벼운 풀밭 위를 걸으며 봄과 새들의 소리를 듣고, 내 마음을 만져주는 행복의 나라로 간다는 노랫말에는 젊음의 방황을 달래주는 위안이 있다.
이 노래를 더러 유신체제에 맞선 투쟁가로 추억한다. 나는 그보다'청춘과 유혹의 뒷장 넘기며'에서 전혀 사적인 정신의 고양(高揚)을 느꼈다.'광야는 넓어요 하늘은 또 푸러요, 다들 행복의 나라로 갑시다'는 끝이 특히 그랬다.
복지국가 논란과 '불안의 정치'
옛 노래를 떠올린 것은 박근혜 의원의 '한국형 복지국가론'이 논쟁을 불렀다고 해서다. 국민을'행복의 나라로'모시겠다는 경쟁이 다시 시작됐다. 유난히 춥고 스산한 연말, 국민에게 위안과 희망을 주는 것은 정치인의 미덕이다. 다만 대선이 다가올 수록 국민의 행복을 위한다며 사생결단 싸울 게 걱정이다. 보수와 진보의 우위를 확인하려는 다툼이 처절할 듯하다.
몇 년 전 새해에 영국의 경제학자 리처드 레이야드가'행복의 정치(Politics of Happiness)'가 시대의 과제라고 지적했다는 글을 썼다. 그는 경제적 복지 증진에도 불구하고 영국 사회의 행복지수가 위기 수준이라고 분석했다. 정부와 사회가 시장과 경쟁 이데올로기에 몰입, 스트레스와 불안을 겪고 낙오하는 국민이 늘면서 사회 전체가 병들었다는 진단이었다.
불행한 국민이 느는 것은 국가적 불행이다. 레이야드는 국민 정서를 돌보는 공공복지지출을 늘려야 한다고 충고했다. 반드시 그의 처방을 좇은 건 아니지만, 나라마다 '행복의 정치'를 열심히 토론했다. 그러나 언론은 세금 인상의 뜨거운 감자는 건드리지 않고 사회적 연대 토론만 하는 것은 위선이라고 비판했다. 또 국민이 소득 계층 지역으로 갈려 적대하도록 부추기는 '불안의 정치(Politics of Fear)'부터 청산하라고 촉구했다.
서구의 복지 논쟁에서 교훈을 얻기 쉽지 않다. 우리 사회는 이미 19세기에 복지국가(Welfare state) 개념을 도입한 서유럽의 논쟁을'복지 포퓰리즘 폐해'를 입증한다고 왜곡하기 일쑤다. 그래서 며칠 전 미국 인터넷신문 허핑턴 포스트의 아리아나 허핑턴이 브라질 룰라 대통령의 성공을 미국 정치가 교훈 삼아야 한다고 쓴 글을 먼저 참고할 만하다.
룰라는 취임 직후 "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니다"라며 이념이 아닌 실용주의를 선언했다. 이어 빈곤과 빈부 격차 등 국가적 아젠다에는 적극 개입하면서도 재정 건전성과 민간 자율을 중시했다. 그 결과, 브라질은 오랜 좌우 대립을 극복하고 성장과 복지를 함께 좇는 모범이 됐다. 퇴임을 앞둔 룰라는 지지율 80%를 누리고 있고, 후임을 뽑는 대선에서 모든 후보가 '룰라보다 더 룰라적인'공약을 내세웠다.
허핑턴은 미국의 정치엘리트들은 진보와 보수의 이념 대결이 20세기의 낡은 틀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충고한다. 브라질의 복지수준은 서구나 미국과 견줄 수 없다. 그러나 정치와 미래에 대한 국민의 기대는 훨씬 높다. 한때 계층 상승의 기회가 활짝 열린 사회이던 미국은 역사 흐름에 역행하고 있다고 허핑턴은 지적했다.
사회적 타협 이끄는 게 관건
룰라의 브라질형 복지국가는'Well-being state'를 표방한다. 복지와 행복을 아우른 개념이다. 서구 복지국가들도 애초 계층간 타협을 통한 공동체의 평화와 행복을 추구했다. 서구 모델을 대표하는 스웨덴인들이'국민의 집(folkhemmet)'이라 부르는 복지국가의 근본은 현실의 행복을 나누며 더불어 사는 사회이다.
언론을 포함한 우리 정치 엘리트들은 벌써 공공복지지출 규모까지 왜곡하며 다툰다. 서구의 경험에 기초한 정책 대안은 이미 나와있다. 우리 사회가 가진 것을 나누며 함께 행복의 나라로 가는 타협을 어디까지 이룰 수 있을지, 그게 정치 지도자들이 앞장서 고민하고 토론해야 할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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