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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범태의 사진으로 본 한국현대사] <8> 기억에 남는 취재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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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범태의 사진으로 본 한국현대사] <8> 기억에 남는 취재현장

입력
2010.12.27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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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 년에 걸친 신문사 사진기자 생활은 수 많은 현장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였다. 조선일보, 한국일보, 세계일보에서 일했으니 신문사의 사풍도 서로 다르고 그만큼 얘깃거리도 많다. 주요 현장과 동료 언론인들을 중심으로 입사 때부터 기억을 더듬어 보고자 한다.

1955년 조선일보 사진부에 들어가 뭔가 중요한 취재를 맡고 싶었으나 기회를 갖지 못했다. 선배들의 견제도 만만치 않은데다 발행 면수도 워낙 적었기 때문이다. 일주일 신문이 18면에 불과했고 56년에 들어서야 일주일에 24면으로 증면했다. 요즈음 토요일자 하루 면 수에도 못 미치는 분량이다.

입사 한 두 해가 지나며 당시엔 누구나 그랬듯이 동료들과 정보교환을 위해 회사 옆 수궁다방과 무교동 상록수다방을 기웃거리는데 사진 찍기 힘든 사건이 하나 발생했다. 대한해운공사의 경리책임자가 경찰 조사를 받다가 지병으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 버린 것이다. 신문에 사진을 내기 위해서는 병실에서의 모습을 찍어야 하는데 경찰의 저지로 도무지 접근이 되질 않았다.

취재를 자원까지 하고 나왔는데 빈손으로 회사에 들어서니 이종옥 사진부장이 대뜸 묻는다. "어떻게 됐어?" "못 찍었습니다. 이부장은 "아니, 기자가 그것 하나 제대로 못하나?"하며 화를 냈다. "다시 가봐!" 힘없이 회사를 나섰다. 사진을 못 찍으면 회사에서 짤린다는 나의 말에 사복 경찰들은 "당신 살리기 위해 내 모가지를 바치란 말이냐?"고 답하며 완강히 버텼다.

도무지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었다. 회사로 귀환하니 성인기 편집국장과 유건호 사회부장까지 나서 다시 한번 병원에 가보도록 요구했다. 이번에도 못 찍으면 사표를 내리라 생각하고 병원에 들어서니 마침 점심시간이다. 의사들이 다른 방에서 가운을 벗고 밖으로 나가는 걸 보고 재빨리 흰 가운을 실례했다.

가운 밑으로 카메라를 감추고는 고개를 숙인 채 문제의 2층 병실로 들어섰더니 양쪽으로 두 명씩 네 명의 환자가 누워 있었다. 누군지를 알 수 없어 '아무개 부장 좀 어떠세요?"하니 안쪽의 한 환자가 담요를 걷고 일어난다. 어리둥절하는 환자의 손목을 잡으며 병세를 보는 의사인 양 "특수한 환자니 차트에 붙일 사진부터 하나 찍읍시다."하고는 플래시를 한방 펑 터뜨린 후 재빨리 3층으로 올라와 화장실에 가운을 벗어 놓고는 '걸음아 날 살려라'하고 신문사로 내뺐다.

회사로 오는 동안 '잘 찍혔을까?'하는 불안한 마음이 떠나질 않았다. 요즘은 즉석 확인이 가능한 디지털에 연속촬영을 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플래시 벌브 한 번만 터뜨리면 끝이었다. 현상을 해보니 고맙게도 사진이 제대로 찍혀 있었다. 필름을 본 사진부장도 좋아하고 나도 덩달아 우쭐해졌다. 이 사건은 내가 사진기자의 길을 계속 걷느냐 마느냐의 갈림길이었다.

이 후 주로 스케치 사진을 많이 찍었다. 지금의 교보빌딩 뒤가 당시는 개천이었고 이 곳과 한강 인도교 위 쪽 백사장이 내가 즐겨 찾던 스케치 장소였다. 일주일에 한 번 사회면 한 쪽 구석에 실리는 스포츠 사진을 위해 축구, 야구는 물론 수영과 권투 경기까지 열리던 동대문운동장도 나의 주무대였다. 서울 시내만 돌다가1958년 5월 나환자를 수용하고 치료하는 소록도 미감아들의 운동회를 취재하러 첫 지방 출장에 나섰다.

후에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으로 유명해진 어린 사슴을 닮았다는 섬 소록도.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한센병 환자들이 고립돼 수용된 곳. 지금이야 교통이 좋아져 온 나라가 일일 생활권으로 묶여 있지만 당시 전라도 고흥은 멀고도 먼 곳이었다. 전라선 기차를 타고 순천, 고흥을 거쳐 이튿날 소록도병원에서 운행하는 배를 타고 섬에 들어서니 문둥이 시인 '한하운'의 '소록도 가는 길'이란 시가 구라공원 입간판에 쓰여 있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수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절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 리 먼 전라도 길"

입간판에는 '나병은 불치의 병이 아니다'라는 글귀도 함께 쓰여 있었다. 5월 17일 수용소 내 소록도 국민학교에서 운동회가 열렸다. 나환자와 이들의 미감 자녀가 사는 구역은 철조망으로 분리됐고 이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한센병 환자와 건강한 자식들이 구분됐다. 환자들은 누가 자기의 자식인지 모른다. 어머니 배속에서 나오는 즉시 아이들은 부모와 격리되기 때문이다. 서로 모르는 것이 낫기 때문이라고 했다.

운동회가 시작되자 미감아들이 취주악대를 따라 재롱을 떨며 행진하기 시작했고 모두들 운동복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있었다. 나환자들에게는 이 미감아들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보고 싶었을까! 내 자식이 누구이고 누가 누구의 부모인지 모른 채 그저 박수를 치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눈물이 핑 돌았다. 자신은 비록 천형으로 흉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내 아이만은 건강하고 해맑게 자랐으면 하는 마음이 절로 전해져 왔다. 환자들 중에는 장님도 섞여 있었다. 힘차게 뛰는 아이들의 운동회를 마음으로라도 보고 싶었을 것이다. 먹먹해진 가슴으로 환자들과 교실의 아이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듬해도 같은 날 운동회를 보기 위해 시간을 내어 소록도에 들렀더니 비가 와서 연기됐다고 한다. 다른 출장 길에 잠시 짬을 낸 것이라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마음이 헛헛해지고 스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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