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의 사고로 부모님을 여읜 소년이 있다. 마음의 상처 때문에 소년은 학교를 가지 않는다. 삼촌이 소년에게 말한다. 학교를 안 가려면 매일 20km를 뛰어라. 네가 제대로 뛰었는지 알 수 없으니 코스 도중에 있는 가게들에 들러 사인을 받아올 것. 종이를 들고 소년은 달린다. 편의점 점장, 도장집 아저씨, ?떵뮌訣?아줌마, 칼국수집 청년, 나물가게 아줌마가 사인을 해주면서 소년을 구박한다. 네가 그 아이구나. 네 삼촌한테 다 들었다. 친구를 때려 이빨을 네 개나 부러뜨렸다며? 자, 얼른 달려!
억울해진 소년은 동네를 다 돌고 와서 삼촌한테 항의한다. 삼촌의 사려 깊은 해명이 이렇다. "미안해. 불쌍한 놈이 되는 것보다는 한심한 놈이 되는 게 더 나을 것 같았어." 닫혀 있던 소년의 마음이 열린다. 삼촌, 저 학교에 다시 갈게요. 소년이 달리게 된 이유를 잘못 알고 있기는 했지만, 동네 사람들은 상처 입은 소년의 달리기를 내 일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도 모르게 한 소년의 상처를 보듬어 주게 된 것이다. 이렇게 어떤 사소한 선의들은 서로 연결되어 공동체를 형성하기도 한다.
가을에 출간된 윤성희의 소설 의 한 장면이다. 올해의 절반을 우리는 먹을거리를 놓고 논쟁하느라 보냈다. 피자와 치킨 얘기다. 동네 가게들이 망하더라도 더 벌고야 말겠다는 대형 유통업체들에 대해서는 새삼 보탤 말이 없다. 프랜차이즈 기업들의 원가 책정에 문제가 있다면 그건 또 따져볼 일이겠다. 그런데 동네 가게들이 비싸다고 비난하는 분들을 보는 일은 좀 서글펐다. 잘은 몰라도 동네 점주님들이 떼돈을 벌지는 않을 것이다. 왜 '우리'끼리 싸워야 할까. 우리는 공동체가 될 수도 있는데.
그래서 소설의 저 장면을 가끔 떠올리고는 한다. 저 소설처럼 서로에게 따뜻할 수는 없을까 꿈 꿔보는 것이다. 예컨대 이런 식으로. "아빠, 퇴근할 때 치킨 사다 주세요. 골목 입구에 있는 유미치킨에서요. 아시죠, 유미랑 저랑 단짝인 거. 2,000원 더 비싸다고요? 제 용돈에서 깎을게요, 아빠."
이런 전화는 또 어떤가. "거기 피자집이죠? 피자 한 판 배달해 주세요. 30분 이내로 오시면 앞으로 절대 주문 안 할 겁니다. 지각 배달 벌금? 그거 제가 낼게요. 배달 청년한테 오토바이 운전 조심하라고 전해주세요."
이것도 다 돈이 있어야 부릴 수 있는 여유일까. 그러나 일주일에 한두 번 피자나 치킨을 사먹을 정도의 상황이라면 이 정도 여유는 부려볼 만하지 싶다. 우리가 "배달 치킨, 확실히 비싸다"고 말씀하신 대통령만큼 가난한 건 아니니까. 아니, 우리도 가난하긴 하지만, 마음까지 가난해지는 건 너무 슬프니까. 물론 자본주의 사회이니까 소비자는 더 싼 제품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그런데 그 권리의 행사가 행여나 우리 이웃의 희생을 낳는다면? 구조를 바꿔야 할 일이겠지만 그것 말고도 할 일이 있지 않을까.
여기는 식당이다. 일손이 부족해 주문은 밀리고 아주머니는 진땀을 흘린다. 아저씨들에게서 반말로 불평이 터져나올 만한 타이밍이다. 그때 그런 아저씨들이, 흡사 어머니와 아내를 보듯 미소 띤 얼굴로, 정리되지 않은 테이블을 직접 물수건으로 닦거나 조용히 물과 반찬을 들고 온다면? 기획재정부 장관님 말씀대로 복지가 나라 형편이 되어야 '즐길 수 있는' 것이라면, 이제 복지는 우리가 서로에게 제공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소한 선의들로 이루어지는 공동체를 꿈꾸어야 할 이유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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