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소원을 말해봐, 내게만 말해봐”라고 속삭이며 늘씬한 다리를 척척 내딛던 걸그룹 소녀시대의 아홉 멤버들이 올해는 “오오오오! 오빠를 사랑해”라고 외치며 엉덩이를 살랑거린다. 젊은 남성 팬들은 물론 30~40대 남성들도 그들의 무대를 더 이상 곁눈질로 보지 않는다. ‘삼촌 팬’이라는 새로운 팬층을 형성하며, 당당하게 소녀들이 만들어내는 화려한 퍼포먼스에 열광한다.
국내에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린 연예 매니지먼트 산업은 소녀시대처럼 잘 기획된 아이돌 그룹을 봇물처럼 쏟아냈고, 대중은 그들이 생산해내는 섹슈얼리티 이미지를 거리낌없이 소비한다. 남자 연예인들이 드러내는 복근과 여자 연예인들이 뽐내는 허벅지는 더 이상 꼴불견이 아니라 동경의 대상이 됐다.
이승철과 소녀시대의 ‘소녀시대’
1989년 12월 발표된 가수 이승철의 ‘소녀시대’는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이승철이 소녀적 감수성을 담은 가사를 호소력 짙은 보컬로 녹여내며 여심을 사로잡았던 곡이다.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2007년 11월, 윤아 등으로 구성된 걸그룹 소녀시대는 이승철의 원곡을 리메이크한 ‘소녀시대’를 발표했다. 발랄한 복장을 하고 멤버들이 자기복제를 한 듯 똑같이 앙증맞은 춤을 추며 부르는 그들의 ‘소녀시대’에는 감수성과 가창력은 휘발한 대신 강렬한 이미지만 남았다.
소녀시대가 데뷔할 당시 소속사인 SM엔터테인먼트는 소녀시대라는 그룹 이름에 대해 “소녀들이 평정할 시대가 왔음을 의미한다”며 “어학 실력은 물론 가수, 탤런트, MC 등 여러 분야에서 활약할 다재다능한 멤버들로 구성됐다”고 말했다. 잘 만들어진 상품이라는 뜻과 다르지 않다.
1990년대 후반부터 SM엔터테인먼트를 비롯해 DSP미디어, YG엔터테인먼트, JYP엔터테인먼트 등이 잇따라 아이돌 그룹을 양산해 내면서 이제 그들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만큼, 범람의 수준에 이르렀다. 그들은 대학가요제나 강변가요제 등 공식화된 스타 배출의 창구를 통하거나 언더그라운드에서 실력을 쌓아 주류로 편입하는 대신 어릴 때부터 연습생이라는 신분으로 기획사에 소속돼 철저한 훈련을 받는 시스템을 통해 스타로 만들어진다.
이런 스타 시스템의 시초는 뉴밀레니엄을 맞이하던 2000년에 데뷔한 당시 13세 소녀가수 보아로 거슬러 올라간다. 보아는 데뷔 전 3년의 준비기간을 거쳤는데, 춤과 노래보다도 외국 진출을 위한 외국어 공부를 가장 먼저 시작했다. 당시 SM엔터테인먼트의 이수만 대표는 “최소 50억원이 투입되는 프로젝트라 신중할 수밖에 없었지만 보아를 본 뒤 주저함이 없었다”고 말했다. 2001년 3월 일본에 진출한 보아는 꼭 1년 만에 선보인 정규앨범 ‘Liten To My Heart’로 발매 첫날 일본 최고의 인기가수 아무로 나미에를 제치고 오리콘차트 앨범판매 1위에 올랐다. 그리고 이제는 경제가치 1조원에 육박한다는, ‘걸어다니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택광 경희대 영미어학부 교수는 “뉴밀레니엄 10년 동안 문화산업은 투자와 산출이 가능한, 합리적 시장으로 자리잡았다”며 “하지만 비슷한 유형이 자극적으로 확대재생산 돼 창조적인 역동성은 떨어지는 구조에 머물러 있다”고 진단했다. 이 교수는 “문화산업이 예측 가능한 시장으로 성장한 만큼 새로운 아이템을 발굴하는 데 재투자가 이뤄져야 선순환 구조가 정착될 수 있다”고 말했다.
꿀벅지와 식스팩, 베이글녀와 짐승남
2000년대 들어 대중가요 분야를 필두로 정착된 연예 매니지먼트 시스템은 콘텐츠보다 스타의 이미지를 만드는 데 방점이 찍혀있었다. 생산자는 좋은 노래를 만들기보다 현란한 퍼포먼스를 짜내는 데 공을 들였고, 소비자는 덩달아 콘텐츠보다 이미지를 소비하는 데 열을 올렸다.
선풍적 인기를 모은 원더걸스의 ‘텔미’는 같은 리듬이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후크송의 효시 격인데,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작곡가들이 차마 하지 못했던 시도였다. 하지만 이제 후크송은 인기가요의 필수 코드가 됐다. 후크송을 생산하는 것도 소비하는 것도 이제는 누구도 트집 잡지 않는다.
‘꽃미남 열풍’은 이미지 소비의 대표적 사례다. 드라마 ‘가을동화’(2000)의 원빈, ‘뉴논스톱’(2000)의 조인성 등을 꽃미남이라고 지칭하는 표현이 확산되면서 남자의 외모에 대한 소비가 급물살을 탔다. ‘여자는 외모, 남자는 능력’이라는 등식이 성립하지 않는 시대, 오히려 그 거꾸로인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2001)라는 책을 쓴 문화비평가 남승희씨는 “남성에게서 힘과 지위, 경제력을 기대하는 대신 아름다움 자체만을 욕망할 수 있는 독립적인 여성들이 출현하면서 남성 역시 대상화해서 바라볼 수 있는 여성들의 사회적 세련화가 이뤄졌다”고 꽃미남 열풍 혹은 미소년 애호의 배경을 설명했다.
꽃미남과 함께 몸짱 열풍도 거셌다. 그룹 신화는 2001년 남성 그룹으로는 이례적으로 누드 화보집을 내며 몸짱 대열의 선두에 섰고, 남자 연예인들은 너나할 것 없이 몸 만들기에 돌입했다. 이른바 ‘초콜릿 복근’으로 표현된 남성 외모에 대한 대중의 열망은 그룹 2PM, 드라마 ‘추노’의 인기 등에 힙입어 ‘짐승남’이라는 새로운 칭호로 귀결됐다.
여성의 외모에 대한 소비는 더 세분화됐다. 단순히 미녀라는 타이틀에 그치지 않고 S라인, U라인, V라인 등 날씬하면서 볼륨감 있는 몸매나 갸름한 얼굴선 등을 표현하는 수식어들이 속속 등장했다. 그룹 애프터스쿨의 멤버 유이에게서 비롯된 말 ‘꿀벅지’(꿀처럼 달콤한 허벅지), 동안(베이비페이스)에 글래머러스한 몸매를 가진 여자를 가리키는 말 ‘베이글녀’ 등은 표피적인 것의 소비에 열광하는 우리 대중문화의 현주소를 나타내는 용어들이다.
원용진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외모와 이미지 중심의 대중문화 소비 획일화도 결국은 독점적 공장(일부 매니지먼트사)에 의한 생산의 획일화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한정된 문화적 메뉴를 가지고 대중들이 좀 더 재미있는 놀거리를 찾는 과정에서 이미지 소비가 노골화, 세분화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김경준기자 ultrakj75@hk.co.kr
■ '리얼'의 힘
최근 10여년 간 대중문화 최고의 히트 상품을 꼽으라면 단연 ‘리얼 버라이어티’가 0순위다.
2000년대 초중반 ‘개그콘서트’를 앞세운 공개 코미디 프로그램과 쌍벽을 이룬 예능 프로그램은 연예인들의 장기자랑이나 짝짓기가 게임과 버무려진 연애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었다. 2000년 MBC ‘스타 서바이벌 동거동락’을 필두로 2002년 KBS ‘산장미팅 장미의 전쟁’, MBC ‘강호동의 천생연분’, 2003년 SBS ‘X-맨’, 2004년 SBS ‘리얼로망스 연애편지’까지 그야말로 2000년대 중반까지는 연애 버라이어티의 전성시대였다. 유재석과 강호동이 최고의 MC로 발돋움한 것도 이 때의 일이다.
이후 MBC ‘무한도전’(2006), KBS ‘해피선데이-1박2일’(2007), SBS ‘패밀리가 떴다’(2008) 등 리얼 버라이어티를 내세운 프로그램들이 등장하며 예능 프로그램에 일대 변혁을 몰고 왔다. 대중은 그들의 도전기와 여행기를 보며 ‘리얼’에 열광했다. 프로그램을 통해 드러나는 그들의 모습을 연예인의 일상이라고 여기는 대중의 엿보기 심리가 그들의 땀방울과 절묘하게 어우러져 시너지를 빚어냈다. 승승장구하던 ‘패밀리가 떴다’가 지난해 10월 참돔 낚시와 관련, 조작 방송 논란이 제기된 후 인기가 곤두박질친 사례는 대중이 얼마나 ‘진짜’에 심취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방송사들도 리얼 버라이어티의 공적을 치하했다. KBS 연예대상은 2008~2009년 ‘1박2일’의 강호동에게, 올해는 ‘해피선데이-남자의 자격’의 이경규에게 대상을 안겼고, MBC는 유재석(2006, 2009)과 무한도전팀(2007)이, SBS는 ‘패밀리가 떴다’의 유재석(2008, 2009)과 이효리(2009)가 연예대상을 거머쥐었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는 “처음엔 연예인이라는 사람들의 삶을 훔쳐보고픈 대중의 심리에서 리얼 버라이어티가 시작됐지만, 리얼을 표방한 방송에 나오는 그들의 모습은 ‘나랑 별 차이 안 나네’라는 동일시 심지어 연민으로까지 이어지며 대중이 적극적으로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호응하는 창구의 역할을 했다”고 분석했다. 이 교수는 “이는 실제로 대중이 대중문화를 생산하고 향유하는, 진정한 의미의 대중문화의 시대가 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김경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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