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밑을 맞아 돌아보니 기사를 위해 올 한 해 본 영화만 300편을 훌쩍 넘는다. 인터뷰를 위해 만난 국내외 영화인은 60여명. 여러 취재 현장과 술자리 등에서 스치고 부딪힌 영화인들은 셀 수 없다. 관객으로서 하염없이 행복했던 영화들이 있었고, 상영 중에 극장 문을 박차고 나가고 싶은 졸작도 여럿 만났다. 해외 영화제에서 한국영화의 성취를 지켜봤고, 영화진흥위원회 수장의 불명예스러운 퇴진을 목도하기도 했다. 영화 담당 기자로서 올해도 다사다난했다.
올 한 해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지난 5월 ‘시’의 칸국제영화제 최우수각본상 수상이었다. 국내 영화 최초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을 것이란 기대가 한껏 부풀어 있었기에 아쉬움이 넘쳤다. 시상식 뒤 만난 영화배우 윤정희가 물기 어린 눈빛으로 “난 괜찮아”라고 말했을 때 태국 기자들의 환호성이 오버랩됐다. 아피차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태국영화 ‘엉클 분미’가 황금종려상을 거머쥐기까지 영화제 프레스센터는 올림픽 경기장 분위기를 떠올리게 했다. 영화가 영화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새삼 느낀 자리였다.
홍상수 감독의 ‘하하하’가 칸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 대상을 받았을 때 출연배우 예지원이 드레스에 적신 기쁨의 눈물도 쉬 잊히지 않는다. 국내에서 가장 칸을 많이 찾고도 빈손으로 돌아가곤 했던 홍 감독이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 위원장이 선물한 축하 와인으로 오랜 설움과 피로를 씻어내던 밤도 인상적이었다.
지난 10월 열린 부산영화제는 프랑스 여배우 줄리엣 비노쉬의 춤으로 오래도록 기억될 듯 하다. 김동호 위원장의 퇴임을 아쉬워하는 자리였지만 그의 막춤은 취재만 아니면 함께 스텝을 맞춰보고 싶다는 욕구를 불쑥 솟구치게 할 만큼 열정적이었다.
최근 송년 술자리에서 만난, 잘나가는 한 흥행 감독이 취중에 던진 한마디는 충격적이었다. 기획하는 영화마다 착착 진행이 될 정도로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그는 “이창동, 박찬욱 감독에게 콤플렉스를 느낀다”고 말했다. 배부른 소리라는 힐난이 쏟아질 만도 하지만 영화를 그저 상품으로만 보지 않는 그의 고뇌가 느껴져 신선했다. 물론 그는 “그래도 난 행복한 놈”이라고 말했지만.
존폐의 기로에 선 한 영화제가 비상회의를 열고 있는데 영화제의 주요 관계자가 문득 일어나 피아노를 쳤다는 소문을 듣고 기겁을 한 일도 있다. 올해 가장 황당한 사건으로 꼽을 만하다.
많은 영화인들이 바라던 일이 이뤄지지 않았고, 예상치 못했던 감동적인 순간을 접하기도 했고, 때로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던 한 해를 보내며 또 한 번 의례적인 것 같지만 진심이 담긴 기원을 해본다. 내년 충무로는 다복하기만을. 그래도 연말이니까. 새해를 맞이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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