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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에서 노숙인 무료 진료하는 예비 의사들/ "상처 입은 마음까지 치료해주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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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에서 노숙인 무료 진료하는 예비 의사들/ "상처 입은 마음까지 치료해주고 싶어요"

입력
2010.12.26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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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은 30년 만에 가장 추운 성탄 전야(前夜)였다. 최저 영하 15도 아래로 내려간 맹(猛)추위는 뼛속까지 후벼 팠다. 이날 밤 7시 서울역 지하도엔 두꺼운 상자로 얼기설기 만든 종이 집이 하나 둘 지어졌다. 오갈 데 없는 이들에겐 보금자리이지만 감당 못할 추위가 밀려오면 속절없이 무덤이 될 수도 있다. 노숙생활 6년째인 염모(65)씨는 "어제도 둘인가 얼어 죽었어"라며 몸을 잔뜩 웅크렸다. 서울시가 추산하는 노숙인 수는 약 2,715명(올해 10월 기준).

서울역 한 귀퉁이에는 60~70대 노숙인 대여섯 명이 30분 전부터 벌벌 떨고 있다. 이윽고 대학생 3, 4명이 나타나자 그제서야 입가에 미소가 슬쩍 비친다. 청년들은 각 대학 의료보건학과 학생으로 꾸려진 '서울역 노숙인 진료소 학생모임' 회원이다.

가입 회원 수는 450명, 활동인원은 약 40명이다. 매주 금요일 오후 7시30분이면 이곳에 나와 노숙인을 진료한다. 1998년에 시작해 10년이 훌쩍 넘었다. 단 한 번도 빼먹지 않았다. 창단멤버이자 이날도 봉사를 나온 정일용(45ㆍ원진녹색병원) 전문의는 "진료날짜, 시간을 바꾸면 약을 못 타는 분들이 계실 것 같아 철저하게 약속을 지킨다"고 했다.

학생들은 전문의와 함께 예진 검약 투약 등을 돕는다. 이날 봉사인원은 평소보다 많았다. 이준행(21ㆍ중앙대 의예과1)씨는 "아무래도 춥고 크리스마스 이브라 행여 아무도 안 나올까 봐 나왔는데, 다들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라고 웃었다.

진료가 시작됐다. 도박으로 퇴직금과 전 재산을 날린 후 4년째 노숙을 하고 있는 김모(58)씨는 "처음에는 가족들 보기 민망해서 안 들어갔더니 이제 연락조차 끊어졌다"며 "병원에는 아무리 못해도 진료비 4,000원에, 약값도 드는데 여기서는 공짜로 해주니깐 추워도 꼭 온다"고 연신 기침을 해댔다. 그는 전립선 비대증, 고혈압, 빈혈에 감기도 앓았다.

고혈압과 당뇨병을 앓는 이모(68)씨도 "태어날 때부터 부모 없이 살아, 30년 가까이 영등포 역사에서 지냈다. 일부러 약 타러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이날 방문한 노숙인은 20명 정도, 매주 30~40명은 기본이다.

동장군은 따뜻한 봉사를 하는 이들의 손도 발갛게 부어 오르게 했다. 굳어진 손마디 사이로 작은 알약이 자꾸 떨어졌다. 올 4월부터 동참한 김민재(18ㆍ성신여대 글로벌의학과1)씨는 "당연히 춥고 힘들지만 저렇게 약을 타기 위해 줄 서 있는 분들을 보면 허투루 할 수 없다"고 했다. 약품을 통째로 노숙인에게 주면 약국에 되팔 우려가 있다며 일일이 약을 한 알 한 알 정성껏 봉투에 넣고, 연고도 덜어서 나눠줬다.

고된 만큼 값지다. 문지현(19ㆍ중앙대 의예과1)씨는 "도움이 절실한 이들로부터 등을 돌리고 사는 일이 의사로써 과연 옳은 일일까 고민했다"며 "결국은 그들과 건강하게 함께 이 사회를 사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고 답했다.

이준행씨는 "한 노숙인이 '너희가 우리에 대해서 얼마나 안다고, 여기 와서 의사 질이냐'고 소리를 치며 진료를 방해한 적이 있다"고 했다. 아무리 좋은 말로 타일러도 듣질 않더니 선배가 그의 손을 꼭 부여잡은 채 '많이 외로우시죠'라고 하자 울면서 속내를 털어놓더라는 것이다. "적대적이고 상처투성이인 그들의 마음까지는 내가 고쳐주지 못했구나 하고 반성했어요."

김유경(19ㆍ성신여대 글로벌의학과1)씨는 "노숙인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처음엔 무서웠는데 이제 2, 3주에 약 타러 오시는 단골 노숙인 어르신은 기다려지고, 그새 험한 일은 안 당했는지 걱정된다"고 말했다.

매달 150만원에 이르는 노숙인 약값과 운영비는 모두 이 모임을 거쳐간 선배들의 후원금과 인도주의의사실천협의회를 통해 마련한다. 후원 및 참여문의 (02)766-6024

강지원기자 styl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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