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얼 퍼거슨 지음ㆍ이현주 옮김
민음사 발행ㆍ940쪽ㆍ4만5,000원
"살아있는 존재는 이질적인 집단을 파괴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지켜내는 것입니다. 요컨대 우리가 인간의 공격적인 성향을 억누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당신과 나, 그리고 다른 많은 이들이 전쟁을 단순히 인생의 가증스러운 요구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에 격렬하게 반대해야 합니까?"
1931년 아인슈타인이 프로이트에게 반전적 지식인 단체를 꾸리자고 제안했을 때 프로이트로부터 돌아온 대답이다. 인간의 파괴 욕구에 대한 프로이트의 통찰은 불과 10여년 뒤 그와 아인슈타인을 낳은 유대인들이 겪을 비극, 제2차 세계대전을 묵시적으로 꿰뚫고 있는 듯하다.
20세기를 다루는 역사서들은 많다. 가령 20세기를 격렬한 종교분쟁이라는 시각으로 통찰한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의 <극단의 세기> , 20세기를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 세기로 바라본 미국의 자유주의 역사학자 폴 존슨의 <모던 타임스> 등은 지난 세기에 대한 좌우 지식인들의 시각 차를 비교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역사서다. 모던> 극단의>
스코틀랜드 출신의 역사학자인 니얼 퍼거슨(46) 하버드대 역사학과 교수는 2006년 발표한 20세기사인 <증오의 세기> 에서 "20세기는 왜 그토록 극단적 폭력으로 점철됐는가?"를 묻는다. 20세기를 프로이트가 제시한 인간의 파괴 욕구가 고삐 풀린 시대로 간주하는 그가 내놓는 대답은 세 가지. 민족과 인종 갈등의 분출, 근대 제국들의 영향력 쇠퇴, 극심한 경제적 변동이다. 증오의>
그는 책 서두에서 "1901년, 세계는 제국들의 세상이었다. 하지만 제국이 강해서가 아니라 약해서 문제였다"라고 갈파한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대영제국, 러시아제국,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오스만투르크 제국 등 구 제국들은 급격히 쇠약해졌는데, 이런 구 제국의 영향력 감퇴가 이후 제국의 경계에 놓여있던 인종과 민족 간의 학살의 불쏘시개가 됐다는 논리는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20세기의 인종학살을 다루는 통상의 역사서들은 나치 독일이 저지른 유대인 학살에만 집중하지만 저자는 좀더 정밀한 현미경을 들이댄다. 이 책이 2차 세계대전 중 벌어진 우크라이나인들의 폴란드인 학살, 크로아티아인들과 세르비아인들 간의 학살, 폴란드인들의 독일인 학살 등 역사 연구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던 비극을 비중있게 다루는 이유다.
9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에 걸맞게 다양한 사료를 동원해 힘있게 논리를 전개하지만 비판적으로 읽어내야 할 지점도 있다. 나치 독일의 제국주의에 대한 맹공이 두드러지는데, 저자는 대영제국의 제국주의와 나치 독일의 그것을 비교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가령 그는 2차 세계대전기 나치 독일의 점령정책을 분석하면서 "히틀러 같은 싸구려 여인숙의 독학자는 영국의 힘의 기초가 강압이나 경멸이 아니라 토착 엘리트들과의 협력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 확실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제국주의라도 최악의 제국주의와 차악의 제국주의를 차등해야 한다는 인식을 내비치는 것으로 보이는데, 제국주의의 피해자였던 우리로서는 쉽게 동의할 수 없는 논리다. 일본군 위안부 출신 한국인 여성의 증언을 삽입하는 등 20세기를 보는 시야를 넓히려고 애는 썼지만 태평양전쟁을 본격적으로 다룬 장은 16개의 장 중 불과 1개인 점 등 흠결도 눈에 띈다.
저자는 중국과 미국의 경제적 보완관계를 '차이메리카(Chimerica)'라는 합성 용어를 만들어내 설명하는 등 정치개혁 없이 고도의 경제성장을 달성한 중국의 흥기에 주목해온 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기존의 제국이 쇠퇴하면 권력의 공백지대에서 대량학살을 자행하는 정권이 기회를 잡을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이 그가 이 책에서 강조하는 20세기의 교훈이다. 초강대국이었던 미국의 힘이 약화되고 중국이 새로운 강대국으로 떠오르는 현실에서 이 책이 현재성을 갖는 이유다.
이왕구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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