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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당신이 뽑은 2010년의 책은 무엇입니까!

입력
2010.12.24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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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계 각 분야에서 올 한 해를 일구었던 이들의 공통점을 굳이 꼽는다면. 아마 모두 책을 가까이 두고 있다는 게 아닐까. 이들에게 2010년을 보내며 한 해 동안 읽었던 책 중에서 기억에 남는 책을 한 권씩만, 가능한 올해 발행된 신간 도서 중에서 꼽아달라고 주문했다. 이들이 보내준 리스트는 그대로 ‘2010년의 책 한 권’이라는 목록이 될 것 같다.(게재 순서 가나다 순)

▦김병종ㆍ화가/ (이어령 지음ㆍ열림원 발행ㆍ2010)

얼마 전 서울대미술관에서 ‘미술에 인문학을 담다’라는 독특한 행사가 있었다. 이 자리에 불려 나간 나는 ‘바보예수’와 ‘생명의 노래’ 시리즈를 중심으로 내 그림을 관객들에게 보여주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하이라이트는 이어령 선생의 강연 파트였다. 내 졸작들에 대해 그는 동서양의 인문학적 지식의 맥락에서 종횡무진의 해석을 쏟았는데 특히 ‘바보예수’에 대한 것이 탁월했다. 그야말로 꿈보다 해몽이었다.

이어령은 멈추지 않는 기관차이다. 올해만도 몇 권의 책을 쏟아놓았는데 그 중에서도 이 시집은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고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장르가 전혀 다름에도 불구하고 나는 시종 그의 시 위에 내 ‘바보예수’ 연작이 살포시 포개어지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어둠의 벼랑 앞에서/ 내 당신을 부르면/ 기척도 없이 다가서시며/ “네가 거기 있었느냐”고/ “네가 그동안 거기 있었느냐”고/ 물으시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달빛처럼 내민 당신의 손은/ 왜 그렇게도 야위셨습니까/ 못자국의 아픔이 아직도 남으셨나이까./ 도마에게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나도/ 그 상처를 조금 만져볼 수 있게 하소서.’(‘어느 무신론자의 기도2’에서)

▦김지영ㆍ발레리나/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ㆍ문학동네 발행ㆍ2009)

네덜란드에서도 하루키의 인기는 대단하다.(김지영씨는 현재 국립발레단과 네덜란드국립발레단의 수석무용수로 양국을 오가며 활동 중이다) 네덜란드에 사는 지인이 오는 걸음에 책을 부탁했고, 비행기에서 무료함을 달래려고 읽기 시작했다가 한 순간에 빠져들었다. 전에도 하루키의 작품을 읽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의 우울한 정서는 내게 맞지 않았다. 특히 스테디셀러 는 중학교 3학년 때 읽은 탓에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단지 있어 보이는 문장만 만들어내는 작가라고 생각했고, 유명세에 거품이 많다고 믿었다.

그런데 환상적이면서도 인간사를 비유적으로 나타낸 이 작품은 달랐다. 막힘 없이 읽혔고, 나는 그의 독특한 문체에 매료됐다. 가장 큰 장점은 지루하지 않다는 것. 나는 책을 전문적으로 보는 사람이 아니라서 일단 재미있어야 읽는 편이다. 요즘은 하루키의 전작들을 찾아 읽고 있다. 는 영화 ‘인셉션’의 시나리오 작가에게 영향을 끼친 것 같다. 연장선상에서 도 영화로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김현숙ㆍ궁리출판사 편집주간/ (칼 세이건 지음ㆍ사이언스북스 발행ㆍ2010)

평소 강연집이나 인터뷰집의 입말체를 좋아하는데, 칼 세이건이 글래스고 대학에서 한 9회짜리 강연(미발표 원고)을 엮은 것이라 더욱 관심이 갔다. ‘신의 존재에 관한 한 과학자의 견해’라는 부제에서 보듯, 과학자의 입장에서 신과 종교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나직하지만 힘있게,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모습이 참 세련되고 멋지다. 과학을 무작정 어렵고 딱딱한 딴 세계의 일이라 생각해온 나와 같은 독자들에게 인간을 둘러싼 다양한 의문과 반감들을 파헤치는 작업이라고 설명하며 다독여준다.

아무리 그렇지 않으려 해도 나 중심, 인간 중심으로 세상은 돌아간다고 생각하기 쉬운 요즘, 그는 우리에게 밤하늘을 한번 올려다보라고 말한다. 지구처럼 수많은 별들에게도 긴 시간의 수레바퀴 안에서 탄생과 죽음이라는 시간이 찾아온단다. 하물며 그 속의 인간이야 찰나를 살다가는 존재이리라. 나에게 겸손을 가르쳐준 책이다.

▦김훈ㆍ 소설가/ (황현 지음ㆍ실천문학사 발행ㆍ1994)

나는 요즘 나온 책보다는 옛날 책, 특히 기록물을 주로 읽는다. 그 중 하나가 조선 말기 문장가인 매천 황현(1855~1919)의 으로, 그가 자기 시대의 잡사(雜事)를 시시콜콜히 적은 책이다. 서양에서 도입한 신문, 잡지 등의 매체를 저널리즘의 시초로 여기는 통념에서 벗어나, 이 책은 황매천의 다른 저서인 등과 더불어 우리 저널리즘의 연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준다.

황매천은 우국지사로서 시대를 보는 확고한 생각과는 별개로, 탄탄한 과정을 밟아 사실에 접근하고 그렇게 수집한 사실에서 거대한 역사를 읽어낸다. 주관적 의견을 말하더라도 사실을 바탕으로 말해야 한다는 저널리즘의 원칙에 충실한 것이다. 사실에 접근하려는 노력은 별로 하지 않고 섣불리 문장가나 우국지사가 되려고 하는 요즘 언론 행태를 ?책에 비춰볼 만하다. 다만 이 책은 내가 읽었다는 것이지 남에게 추천할 만한 책은 아님을 밝혀둔다.

▦손예진ㆍ영화배우 / (박범신 지음ㆍ문학동네 발행ㆍ2010)

소설을 즐겨 읽는 편이다. 인간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심리학 책들도 많이 사지만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읽기 편한 소설에 마음이 끌린다. 여러 소설 중에 최근 읽은 는 여러 문장을 수첩에 적어놓고 종종 다시 읽어볼 정도로 좋았다.

‘한 순간 무너질 수 있는 게 사람의 가벼운 깃털 같은 지조겠지’ ‘사랑인지 연민인지 인간 자체에 대한 호감인지도 모를 여러 가지 감정들’ 같은 문장이 마음에 와 닿는 소설이다. 노시인의 열일곱 살 여고생을 향한 노골적인 욕망, 베스트셀러 작가 제자와의 부적절한 관계와 파국 등이 일기 형식을 빌어 자세히 묘사돼 있는데 특히 노인의 욕망에 대한 서술이 아주 신선했다. 인간은 나이와 무관하게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매우 매력적이면서도 쉽게 전달해 흥미로웠다. 이성과 감정 사이에서 고뇌하고 욕망에 흔들리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인간의 보편적인 나약함을 깨닫게 됐고, 배우로서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

▦양성원ㆍ첼리스트/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ㆍ현대문학 발행ㆍ2010)

어린 나이에 유학을 떠난 나는 한국어, 영어, 프랑스어로 된 책을 번갈아 읽는다. 이 책은 공연차 영국 런던에 갔다가 영문판으로 구입,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읽었다. 우리에게 전쟁과 테러로 익숙한 나라 아프가니스탄. 부유한 가정의 한 소년이 겪는 성장통을 그린 이 소설은 인간의 감정은 지구촌 어디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이복형제인 소년과 하인 아들의 뜨겁지만 슬픈 우정, 계급사회를 초월한 부정(父情)이 가슴에 와서 박힌다.

배경은 1979년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기 이전부터 2001년 9ㆍ11테러로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할 때까지다. 역사적 사건과 맞물려 이야기는 더욱 진솔한 느낌이다. 요즘 한국 사회를 보면 성적과 승진에 목매느라 정을 잃어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풍부한 감정이 요구되는 음악에서조차 학생들은 명문대에 가기 위해 무한 경쟁하고 있다. 젊은이들에게 특히 권하고 싶은 책이다. 인간의 순수한 감정을 되돌아보는 동시에 낯선 나라에 대한 편견도 씻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책장을 덮을 때까지 한시도 손에서 놓지 못했다.

▦이현우ㆍ서평가 / (슬라보예 지젝 지음ㆍ창비 발행ㆍ2010)

21세기 첫 10년의 교훈을 되새겨보는 에서 ‘비극’과 ‘희극’은 각각 그 첫 10년을 열고 마감하는 두 사건, 2001년 9월 11일의 공격과 2008년의 금융붕괴를 가리킨다. 헤겔의 말대로 철학이 ‘개념으로 포착한 자기 시대’라면, 슬라보예 지젝이야말로 그러한 정의에 가장 충실한 철학자이다. 그는 우리가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지 지속적으로 포착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요점은 두 가지다. 그는 현재 진행 중인 세계 금융위기를 통해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유토피아적 핵심을 분석하고, 한편으론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새로운 형태의 공산주의적 실천이 어떻게 가능한지 탐색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20세기 좌파정치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야만 한다. 베케트의 말을 인용하며 지젝이 강조하는 교훈은 “다시 시도하라. 또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이다. 영국의 역사가 에릭 홉스봄은 이렇게 물었다. “사회주의는 실패했고 자본주의는 파산 상태다. 다음에 올 것은 무엇인가?” 지젝의 대답은 공산주의다. 홉스봄의 질문이 유효하다면, 우리는 그 질문에 대한 지젝의 답변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소위 ‘건강한’ 자본주의 혹은 사회주의냐 아니면 공산주의냐, 지젝이 건네는 선택지다.

▦전중환ㆍ경희대 학부대학 교수(진화심리학)/ (대니얼 데닛 지음ㆍ동녘사이언스 발행ㆍ2010)

신을 둘러싼 과학과 종교 사이의 대립이 치열하게 전개된 한 해였다. 한 편에서는 과학적 합리성의 잣대를 들이대며 신이라는 망상을 강하게 비판한다. 이에 맞서 반대편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신은 과학의 공격에 절대 흔들리지 않음을 역설한다. 이 와중에 논쟁은 ‘과학이라는 종교를 믿는 얼치기 과학주의자’들의 견해에 동의할 것인가 말 것인가로 종종 변질되곤 한다.

는 과학과 종교가 생산적인 대화를 시작할 장을 열어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저자는 종교가 더는 성역이 아니라, 학제적인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하나의 자연 현상임을 주장한다. 이런 바탕에서 진화생물학, 인지심리학, 뇌신경과?등의 최신 과학 분야들을 동원하여 종교를 과학적으로 설명한 성과가 풍부하게 담겨 있다. 대니얼 데닛은 자기가 무신론자임을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학자인데다가, 의 저자 도킨스와 한 패거리(?)로 널리 알려진 탓에 이 책은 국내에서 그다지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러나 종교가 우리의 삶에 끼치는 엄청난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도대체 왜 종교가 존재하는가를 설명해주는 이 책에 다시 한 번 관심을 기울일 만하다.

▦조국ㆍ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공지영 지음ㆍ오픈하우스 발행ㆍ2010)

소설가 공지영씨가 지리산 일대에서 살아가는 문인,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쓴 에세이집이다. 나는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자란 도시인이다. 진보파를 자처하지만 부, 명예, 지위 같은 세속적 가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데 이 책은 도시와 세속을 떠나 자발적 가난을 선택한 인물들이 주인공이다. 물질적 가치보다는 생태적 가치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실제로는 그 가치에 충실하게 살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래서 이 책은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특히 새로운 가치의 중요성을 풀어나가는 방식이 “내가 당신들에게 알려주겠다”는 계몽적 태도가 아니라, 소소하고 재미있는 일상의 에피소드 소개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도 이 책의 미덕이다. 지리산 사람들은 1년에 200만원으로 생활하면서도 자신이 가진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고, 집을 떠날 때는‘누구라도 이곳에 들어와서 살아도 좋다’는 푯말을 걸어둔다. 세속적 가치에 집착하며 까마득히 잊고 살았던 공동체적 삶과 나눔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들어 준 고마운 책이다.

▦하정우ㆍ영화배우 / (구보타 시게코 지음ㆍ이순 발행ㆍ2010)

은 세계 미술사에 큰 획을 그은 비디오아티스트 고 백남준이 어떻게 젊은 시절을 보냈고 사랑했으며 살았는지를 보여준다. 위대한 예술가는 독하고 독선적인데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 갇혀 사는 것 아니냐는 편견을 떨쳐주는 책이다. 섬세하면서도 예민하고 약한 한 예술가의, 사랑 때문에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인간적인 면모가 흥미를 던진다. 특히나 백남준을 오래도록 바로 옆에서 지켜본 그의 아내가 이야기하는 식의 내용이니 더 공감하게 되는 듯하다.

백남준과 아내의 공동작업 이야기, 젊은 시절 그가 예술을 어떻게 생각하며 살았는지에 대한 일화 등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누구보다 앞서간 예술가가 힘든 시절을 어떻게 이겨내고 일가를 이루게 됐는지를 아는 것만으로 내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듯하다. 미국이나 유럽 등에선 백남준이 여전히 많은 관심을 받고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데 비해 정작 국내에선 그의 업적이 덜 알려진 듯해 아쉽기도 하다. 이 책은 그런 백남준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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