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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황제의 칼데라' 경복궁 연못에 숨겨진 조선 옥새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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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황제의 칼데라' 경복궁 연못에 숨겨진 조선 옥새의 비밀…

입력
2010.12.24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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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일 지음

문학동네 발행ㆍ406쪽ㆍ1만2,000원

재독 소설가 강유일(57ㆍ사진)씨의 장편소설이다. 강씨가 1994년 독일에 정착한 이래 대한항공 여객기 폭파 사건을 모티프로 한 장편소설 <피아노 소나타 1987> (2005)에 이어 두 번째로 발표하는 작품이다.

1976년 등단해 20권 가까운 소설을 내며 활발히 활동하다가 독일로 간 강씨는 2001년부터 모교인 라이프치히대학 문학창작과에서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1996년을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의 주인공은 한국계 독일인 판사 우난세. 열 살 때 아버지를 따라 독일에 왔다가 졸지에 고아가 돼버린 그는 한 신부(神父)의 후견을 받으며 출세하지만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을 두려워하며 독신으로 일관한다. "성교의 순간만이 진실한 순간이다. 욕구하고 욕구 당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 살아있다는 증명이다"(85쪽)라고 읊조리면서.

삶을 불신하는 그의 가계에는 처절한 역사의 상처가 새겨져 있다. 조선의 옥새 장인이었던 조부 우숭린은 고종과 모종의 비사(祕事)를 치른 뒤 장안에 가기를 꿈꾸며 중국으로 망명하던 길에 자살한다. 유복자로 태어난 난세의 부친 우현학은 6ㆍ25전쟁 종군기자에서 장면 정부의 총리 대변인으로 승승장구하다가 독일 체류 도중 5ㆍ16쿠데타 소식을 듣고 귀국을 포기한다. 그는 갈라파고스 탐사단에 지원하러 어린 아들을 두고 미국에 갔다가 교통사고로 생을 마친다. 부친에게서 "내가 좌초한 시점에서 시작하라"는 유언과 함께 왕과 공모한 비사를 증언할 기록을 물려받은 현학은 아들에게 "좌초. 또다시 좌초. 더 나은 좌초를"이라는 독려와 더불어 부친의 유품을 물려준다. 좌초된 선조들의 생애는 난세에게 "역사란 승자들의 기록이며, 패자란 역사의 땔감"(53쪽)이라는 비관적 인생관을 품게 한다.

어머니를 잔혹하게 살해한 남자의 재판을 맡고 있던 난세가 두 통의 편지를 받으면서 소설은 탄력을 받는다. 한국의 문화재보호국에서 온 편지는 경복궁 내 연못인 누지(樓池)의 밑바닥에서 고종의 순금 옥새가 발견됐음을 알리며, 조부 우숭린이 이를 해명해줄 단서를 남겼는지를 난세에게 묻는다. 다른 한 통은 난세의 어린 시절 단짝이자 첫사랑이었던 안능라가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음을 알리며 만남을 요청하는 그녀의 오빠_쿠데타에 참가한 전직 장성이자 우현학의 친구_의 편지.

치밀하면서도 부드럽게 읽히는 문장으로 우난세의 현실과 우씨 가문 3대의 비극적 삶을 종횡하던 소설은 난세가 35년 만의 귀국에 앞서 선친들이 닿고자 했던 장안과 갈라파고스를 차례로 방문하면서 하나의 주제로 가지런히 수렴된다.

왕의 분신인 옥새를 심연에 안치하는 상징적 행위로 쇠락하는 왕조에 불멸성을 부여하려 했던 조부, 생명들이 자연의 섭리에 따라 생멸 사이의 순간을 충실하게 살아내는 데 집중하는 땅 갈라파고스에서 인간적 좌절과 욕망을 벗고자 했던 부친. 불멸과 충일이라는, 서로 대척점에 놓인 욕망을 향한 두 사람의 좌절된 노력은, 난세가 갈라파고스의 칼데라호 앞에서 "우리는 모두 생이라는 찬란한 재앙을 사는 순간적 존재"(376쪽)라고 깨달을 때 비로소 그 합일점을 찾는다. 난세는 이렇게 선언하며 선친의 유언을 이어받는다. "인간은 좌초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395쪽)

경복궁의 누지와 갈라파고스의 칼데라호, 옥새의 거북 장식과 갈라파고스의 바다거북 등 시대와 지역을 한 데 엮는 정교한 상징체계를 소설 속에 구축하는 작가의 솜씨가 놀랍다. 광범위하고 철저한 취재의 흔적 역시 작품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강씨는 작가의 말을 통해 "역사라는 거대한 난파선 밑에서 조난을 당하면서도 가차없이 불멸을 꿈꾸었던 사람들의 '찬란한 좌초'에 관한 보고서"를 쓰고 싶었다고 했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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