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에서는 열심히 하니까 성공하게 되더라고요. 사는 게 너무 재미 있어요.” 2007년 국내에 들어온 탈북자 금정숙(41)씨는 요즘 사는 맛이 난다고 했다. 사상범의 딸로 낙인 찍혀 북한의 탄광에서도 일했다는 금씨가 누리는 자유의 맛은 다른 탈북자들과도 사뭇 다를 터였다.
금씨가 북한을 탈출, 중국으로 넘어온 것은 2002년 7월. 국군포로였던 아버지가 남한에 살아있다는 소문에 이를 확인하려 무작정 압록강을 건넌 것이다. 하지만 금씨가 태어난 지 100일이 되던 1969년 10월 강원도의 수용소에 끌려가 연락이 끊어졌던 아버지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북한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가 국경을 넘자마자 2차 연평해전 여파로 국경 수비가 강화됐기 때문. 북한에 두고 온 남편(44)과 아들(18)이 그리워 눈물로 지샌 날의 연속이었다.
가족에게 연락을 하려 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탈북자 신세로 중국을 떠돈 지 1년째. 당시 일하던 칭타오(靑島)의 한 봉제공장 동료가 북한 내 가족에게 은밀히 편지를 보낸다는 소식을 듣고 사정을 해서 남편과 아들에게 쓴 편지를 끼워 넣었다. 그로부터 20일 후 “정숙아 큰 오빠야”라며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다. 너무 기쁜 마음에 “어디야” “어떻게 지내는데”라고 물었지만 오빠가 아니었다. 상대편 남성은 갑자기 목소리를 바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제통신”이라고 했다. “섬뜩했죠. 바로 전화를 끊었어요. 당에서 보낸 경고였겠죠. 내가 가족을 찾는다는 소식을 들으면 남편과 아들이 고초를 겪을 게 뻔했습니다. 그 때부터 가족을 찾는 건 단념했어요.”
이후 금씨는 일에만 몰두했지만 언제나 불안했다. 조선족이 앙심을 품고 중국 공안에 신고라도 하면 북한에 끌려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남에게 욕 먹지 않으려고 그저 말 없이 일만 할 수밖에 없었던 금씨는 다행히 아버지가 6.25 전쟁으로 입대하기 전 낳은 이복 오빠와 만나 남한으로 올 수 있었다. 금씨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긴 봉제공장 사장이 다리를 놓아준 덕분이었다.
서울 영등포 거리를 걷다가 구인광고를 보고 들어간 중국집. 그게 한국에서의 첫 직장이었다. 처음에는 ‘래미안 몇 단지’ ‘A블록’ 등 생소한 단어가 많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주문 한 번 받으려면 ‘죄송합니다’를 셀 수도 없이 반복해야 했죠. 그래도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죽기살기로 매달렸어요. 오전 6시30분에 출근해 다음날 새벽 4시까지 일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요즘 금씨의 자랑은 단연 자신이 운영하는 ‘중국성’이다. 6,000원에 자장면, 볶음밥은 기본이고 탕수육, 양장피 등 요리 중 하나를 선택하는 메뉴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단다. 보통 하루에 주문 건수만 80건, 그릇으로 따지면 수백 그릇이다 보니 하루 해가 짧다. 그는 “제2의 인생을 살게 해준 대한민국에 뭔가 도움을 주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했다.
경찰청은 22일 금씨를 비롯해 성공적으로 한국에 정착해 간호사, 사회복지사 등으로 활동하고 있는 탈북자 50여명을 초청해 간담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통일부 관계자, 북한문제 관련 교수 등 전문가들이 참석해 탈북자들의 애로사항을 듣고 지원대책을 논의했다.
허정헌기자 xsco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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