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ㆍ25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부산은 '피난 수도'라고 했다. 피난 온 중앙 정부가 부산에 터를 잡았기 때문이다. 그 당시 부산의 원주민 인구래야 겨우 30만 명을 넘을까 말까 했다.
그런 판에 모르긴 해도 피난민 인구가 더 많았던 것 같다. 시내며 시내 가까운 산비탈마다 피난민들의 판잣집이 빼곡했다. 거리는 어디 할 것 없이 피난민으로 들끓었다. 번화가인 광복동과 국제시장 거리는 낮이나 밤이나 사람들의 물결로 득실댔다.
다들 기댈 데도 의지할 데도 없는 것 같았다. 온 도시가 그야말로 혼돈이었다. 대낮에도 대포 터지는 소리가 펑펑! 들려 왔다. 낙동강 전선의 폭음이라고 했다. 다들 전전긍긍했다. 불안에 떨고 무서움에 몸서리쳤다.
부산 부두에 미리 배들을 준비해 놓고는 정부는 언제든 일본으로 망명갈 채비를 갖추고 있다는 소문이 떠돌기도 했다. 낙동강 전선이 무너지면 부산의 안전도 보장받기 어렵다는 따위의 악성 루머가 나돌기도 했다. 그러자니 대학의 개강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입학한 지 불과 두어 달밖에 안 되는, 신출내기로서는 할 일 없이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그런 중에 귀가 버쩍 뜨이는 소식을 접했다. 미군 부대에서 수시로 통역사를 모집하고 있다고 했다. 수소문 끝에 중앙동에 있던 미군의 인사 사무소를 찾아 갔다. 이미 수십 명, 아니 100여 명이나 되게 줄을 서서는 차례를 기다리고들 있었다. 그래서 꽁무니에 서 보았다. 소용없었다. 사무소가 하루 일을 마칠 때까지 안쓰럽게 서 있었지만, 차례는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 날도 역시 헛수고를 거의 온 종일 했다.
무슨 다른 방도를 찾아야 했다. 사흘째 되던 날, 덮어놓고 부두에 갔다. 몇 마디 엉터리 영어를 주절댔더니 문지기 미군 병사가 안에 가면 부두 일을 주관하는 사무소가 있다고 했다. 표시를 보고는 2층으로 올라가서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 쪽, 큰 책상을 앞에 놓고는 버티고 앉은 장교에게로 갔다. 절도 인사도 미처 하기 전에 그에게 영어로 말을 걸었다.
"May I ask your favor , please !"
용케 외고 있던 외마디를 내뱉었다.
"저 제발 좀 봐 주셔요" 그쯤 될, 서툰 영어였는데도 장교는 좋다고 했다. 그만한 인사치레 말을 할 줄 아는 게 대견했던 것 같았다.
"좋아 제2부두로 가. 전화해 놓을 테니."
물론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와! 내 영어가 미국인에게 통했어"중얼대면서 불문곡직 그렇게 멀지 않는 길을 내달려서는 제2부두로 갔다. 부두에 주둔해 있던 부대의 대장이 당장 내일부터 나와서 통역 일을 맡으라고 했다.
그래서는 대학 1학년, 국문과 학생은 느닷없이 영어 통역사가 된 것이다. 나 스스로도 긴가민가했다.
한데 다음 날부터 실무를 보게 되면서 말썽이 끊이지 않았다. 미군과 나 사이에 말이 통하지 않는 대목이 너무나 많았다. 영어 회화라고는 그때까지 단 한 시간도 배워본 적이 없는 처지이고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손짓 발짓 섞어서 어떻게, 어떻게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중에 묘한 일을 당했다. 한국군 헌병이 난데없이 미군 헌병에게 체포되어 왔다. 한데 하필이면 나의 소학교 한 반 동창생이 아닌가!
미군 병사들이 부두에서 맡은 일은 부두를 운영하면서 수송되어 오는 각종 물자를 수송선에서 내려서는 각지의 미군 부대로 보내는 것이었다. 한데 제2부두에는 군수물자가 아닌, 일용 잡화가 다루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부두의 한국인 인부들은 소위 '양생이'라는 것을 했다. 물건 몇 가지, 슬쩍 하는 짓을 하곤 했다. 그래서는 인부들을 노상 감시하고 있던 미군 헌병에게 하필이면 내 친구가 걸려들었던 것이다.
나는 당황했다. 그러나 내 친구를 구해야 했다. 그리고 한국 헌병의 명예도 지켜야 했다. 우선 미군 헌병에게 내가 통역이란 것을 밝혔다. 그런 다음 그 피의자는 신분이 당신과 같은 헌병인데 무슨 의심받을 일을 할 턱이 없지 않느냐고 했다. 물건을 슬쩍한 인부를 발견해서는 그 자가 훔친 물건을 압수해서 지니고 있던, 바로 그 순간에 당신 눈에 든 것이 틀림없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이 한국 헌병은 나의 소학교 친군데 평소 그의 소행으로 보아서 한국군 헌병의 신분에 먹칠할 턱이 없다고 힘주어서 역설했다.
그러고 있는데, 마침 옆에 있던 흑인 장교가 중재를 하고 나섰다.
"이 한국인 통역은 나하고 같은 사무소에서 일보고 있어서 나는 그를 잘 알고 있소. 그의 말이라면 믿어도 좋을 것이오"
고마웠다. 그게 미군 헌병에게 말발이 섰던 모양이다. 그렁저렁 경과를 겪고는 미군 헌병은 내 친구를 무죄 방면했다. 그 흑인 장교는 나의 영어선생이다시피 했다. 내가 발음을 잘 못하면, 그 때마다 그 당장에 친절하?교정을 보아주곤 했다.
그의 도움으로 내 친구가 누명을 벗은 일, 그래서 한국군 헌병의 명예가 떳떳하게 회복된 일, 그것은 6ㆍ25 전쟁 중에 내가 올린 전과(戰果)로서 지금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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