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ㆍ1786~1856), 눌인(訥人) 조광진(曺匡振ㆍ1772~1840)과 함께 당대 ‘삼필(三筆)’로 불렸던 조선 후기의 서예가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ㆍ1770~1847)의 작품세계를 조명하는 전시가 마련된다.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은 창암 탄생 240주년을 기념해 22일부터 내년 2월27일까지 ‘창암 이삼만_물처럼 바람처럼’전을 연다. 창암의 미공개 걸작과 문제작, 기준작 등 100여점을 보여준다.
창암은 호남 서단에서 활동하며 서울의 추사, 평양의 눌인과 함께 19세기를 대표한 서예가였다. 추사가 건축적인 예서(禮書)에서 일가를 이뤘다면, 창암은 행초서(行草書)를 발전시켜 물처럼 바람처럼 흐르는 듯한 ‘유수체‘(流水體)로 필명을 떨쳤다.
창암은 몰락한 전주 이씨 집안의 후예로 한평생 글씨를 썼다는 것 외에는 그 삶이 알려진 사실이 별로 없어, 예술세계도 추사의 그늘에 가려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그러나 미당 서정주가 시집 에 실린 ‘李三晩이라는 神’이라는 시를 썼을 정도로 그의 이름은 호남 일대에는 깊이 각인돼 있다.
미당은 이 시에서 ‘李三晩 석 자를 많이 받아다가 집 안 기둥들마다 다닥다닥 붙여 두는데/ 그러면 뱀들이 기어올라 서다가도 그 이상 더 넘어서 못 올라온다는 신념 때문’이라고 했다. 이삼만의 글씨는 물론 그 이름 석 자만으로도 뱀을 쫓는 신통력을 지녔다고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창암은 모필(毛筆)과 함께 남들이 쓰지 않는 갈필(葛筆ㆍ칡뿌리), 죽필(竹筆), 앵우필(鶯羽筆ㆍ꾀꼬리털) 같은 특이한 도구로 글씨를 쓴 사례가 많다. 또 71세(1840년)에 저술한 ‘서결’이라는 서예이론서가 남아 있다.
창암은 추사와 같은 작품에서 만나기도 했는데, ‘광산김씨의 묘비’ ‘김양성묘비’는 앞면은 추사가 쓰고, 뒷면과 옆면은 창암이 썼다. 집안에서 묘비 글씨를 맡길 때 당대의 두 절필을 함께 모셨던 것이다.
전시는 ‘사시사(四時詞)’ ‘언잠(言箴)’ 등 창암의 작품을 전시하는 ‘유수체의 미학’, 20대부터 70대까지 나이 순으로 창암의 작품세계를 살펴보는 ‘창암서예 궤적’, 중국 서예가와 신라의 김생 등 창암에 영향을 준 대가들의 글씨를 볼 수 있는 ‘창암 서예의 뿌리’ 등으로 구성된다.
이동국 서예박물관 학예실장은 “창암은 당대에 붓 한 자루만으로 바람처럼 살다 간 서예가”라면서 “그의 작품에서는 장인정신이 발휘된 극공(克工)을 넘어 신령스러운 통령(通靈)의 경지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서울에서 전시를 마친 뒤에는 전북 정읍(내년 3월5~13일ㆍ정읍사예술관), 전주(3월18~4월17일ㆍ전북도립미술관), 광주(4월23~5월22일ㆍ국립광주박물관)에서 순회 전시된다.
남경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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