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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제기 기자의 Cine Mania] 한국사회 병폐 고발, 충무로는 용감했다

입력
2010.12.20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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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녀가 몸을 던진다. 시골도시엔 어린 죽음에 대한 소문만 무성할 뿐이다. 소녀를 죽음으로 내몬 소년들의 부모들은 입막음에 전력을 다한다. 경찰도, 교사도 아이들 미래 운운하며 진실을 덮으려 한다. ‘냄새’를 맡은 기자조차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서 거간꾼의 역할을 자임한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부도덕과 도덕 불감증을 그렇게 고발한다.

‘시’와 함께 지난 5월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하녀’도 디스토피아에 가까운 한국사회의 어둠을 냉랭하게 전한다. 한 여인이 인파가 몰린 도심 한복판에 몸을 던져도 사람들의 일상엔 변화가 없다. 핏자국이 아직 선연한 곳에서 아무렇지 않게 전단을 돌리고 음식을 배달한다. 역시 칸영화제에서 상영된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은 이 사회의 옳지 못한 방관을 직설적으로 비판한다. 사람이 죽어도 모르쇠로 일관하는 섬마을 주민을 주인공은 낫을 들어 응징한다.

올해 충무로 화제작들은 약속이나 한 듯 한국 사회의 병폐를 묘사했다. 악한 사람들의 부적절한 행동과, 이를 팔짱 끼고 바라보거나 동조까지 하는 대중들의 비열한 행태를 보여주며 지금 이곳의 눅눅한 어둠을 들춰냈다. 검사와 경찰, 기업가, 기자의 더러운 뒷거래를 생중계하듯 보여주는 ‘부당거래’는 충무로가 이 사회에 보내는 묵시록과도 같은 경고장이다.

사회비판과 무관해 보이는 ‘초능력자’에서도 섬뜩한 비유를 맞닥뜨렸다. 부당한 초능력에 저항하기는커녕 좀비처럼 움직이는 지하철역의 수많은 사람들은 대중들의 무력감을 은유한다. ‘아저씨’와 ‘악마를 보았다’는 잔인한 사적 복수와 공권력의 무기력함을 통해 한국사회가 처한 위기의 질감을 전달했다.

홍상수 감독의 ‘옥희의 영화’는 한 지식인(문성근)의 체념 섞인 말을 빌려 비뚤어진 사회를 에둘러 비판했다. “돌아갈 수가 없어. 책이나 읽읍시다. 세상이 이렇게 썩어버리면 책 속으로 가는 거야.” 정말 각자의 방에서 책을 읽으며 부정한 현실을 외면해야 할까. ‘시’는 핏줄대신 윤리를 택한 무지렁이 같은 한 여인(윤정희)을 통해 우리의 갈 길을 조용히 가리킨다. 그 무엇보다 내면에서 울리는 양심의 소리를 따르라고. 예술의 길, 아름다움으로 향하는 길은 진흙탕 같은 이 사회의 현실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고.

1,000만 영화로 극장가가 떠들썩하지도 않았고, 대박이란 수식어를 붙여줄 영화도 많지 않았던 올해. 그래도 유령처럼 떠돌고 있는 우리 사회의 불길한 기운을 포착해낸 점만으로도 의미 있는 한 해를 보낸 충무로다.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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