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와 60년대를 거치며 신문사에 몸을 담고 일하면서도 항상 2대의 카메라를 가지고 다녔다. 하나는 회사 카메라였고 또 하나는 개인 카메라였다. 회사 카메라로 일단 신문사에 제출할 사진을 찍은 후, 다시 개인 카메라인 라이카 3F로 당시 생활상들을 마음껏 찍어댔다. 돌이켜보면 그러한 열정과 작업 과정이 있었기에 소중한 자료도 모아놓을 수 있었고 전시회도 열 수 있었던 것 같다. 사진을 찍을 당시에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던 사건과 현장들이, 세월이 흐르고 나면 역사적인 사건이 되고 귀중한 자료가 된다. 그 동안 전시회도 갖고 사진집도 출간했지만 ‘당시에 사진 정리를 조금만 더 잘 해놓았더라면…’하고 아쉬움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후배 사진기자들은 자신이 찍은 사진의 소중함을 느끼고 정리를 잘 해놓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내 작품 중에 많이 알려진 것 중 하나가 1961년에 신문 지면을 통해 소개한 ‘결정적 순간’이다. ‘사진가 정범태’를 세계에 알리게 된 이 사진은 법정에서의 장면을 촬영한 것이다. 5ㆍ16이후, 군사 정권의 통치로 인해 사회는 경직되고 기나긴 겨울공화국이 시작되면서 많은 범죄자들이 양산됐다. 누군가의 비위를 거슬렸다는 이유로, 또는 근거 없는 유언비어를 유포했다는 혐의로, 때로는 먹고 살기 힘들다는 푸념을 했다는 이유로 무고한 시민들이 군법 재판에 바로 회부되곤 했었다.
1961년 지금의 경기도청 강당 자리인 경기고등군법재판소에서 공판이 열려 동료 기자들과 취재를 가게 되었다. 당시엔 사형이 구형되는 등 커다란 사건이 많았고 기자들의 법정 출입이 가능하던 때다. 법정에 들어서니 푸른 죄수복을 입은 한 젊은 여자가 고개를 푹 숙이고 서 있다. 여자의 뒤에 선 모든 피고들도 손을 앞으로 모은 채,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있으니 선처를 바란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창문으로 한 줄기 햇살이 들어오고 판사가 막 판결문을 낭독하려는 긴장된 순간, 어디선가 자박자박 발자국 소리가 나더니 두세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가 방청석에서 걸어 나온다. 아기의 손을 놓친 방청석의 또 다른 여자는 어찌할 줄 모르는데 아이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여인의 손을 꼭 잡고는 판사석을 바라다 본다. ‘우리 엄마를 살려주세요…’ 말은 없었지만 간절히 호소하는 듯한 이 장면을 라이카 3F를 꺼내 찍었다. 잠시 적막이 흐르고 판사는 여인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그러자 아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방청석으로 돌아갔다. ‘결정적 순간’이 찍힌 순간이었다.
언니의 공판을 지켜보기 위해 이모의 품에 안겨왔던 아이가 엄마의 모습을 보자 쪼르르 그 앞으로 달려나간 것이다. 아이의 행동과 눈빛이 판사의 선고에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카메라에 담긴 그 순간은 여인과 아이의 삶에 결정적 순간이라 아니할 수 없다. ‘결정적 순간’하면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의 사진작가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을 떠올리곤 한다. ‘매그넘’을 만든 사진작가로 ‘결정적 순간 Image la sauvette’은 그가 1932년에 펴낸 사진집의 이름이자 ‘브레송’의 사진 철학을 대표하는 키워드이기도 하다. 그가 말하는 ‘결정적 순간’이란 빛과 구도와 감정이 하나가 되는 순간을 말하는데 나의 사진은 브레송의 그것과는 별 관계가 없다. 단지 그 순간이 인생과 운명을 결정짓는 순간이라 느껴져 그러한 제목을 달았을 뿐이다.
이 작품은 1961년 아사히신문 국제사진전에 출품되어 베스트10으로 뽑혔고 다음 해, 평범사에서 발행한 세계사진연감에 수록되었으며 다시 이 출판사가 10년을 평가해 세계에서 가장 잘 된 사진 34점 중의 하나로 선정되었다. 프랑스의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과 미국의 ‘찰스 무어’ 등 쟁쟁한 작가들과 함께 뽑혀 어깨를 나란히 한 작품이기도 하다. 또한 이 ‘결정적 순간’이 내가 해외 콘테스트에 출품한 마지막 작품이 됐다. 내 사진이 해외에서도 인정을 받는가에 대한 시험에서 어느 정도 만족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수상작들도 있지만 누가 나에게 가장 애착이 가는 사진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나는 ‘모정’이라고 말 할 것이다. 1965년 조선일보사에서 사진부장을 맡으면서도 취재 현장엘 나가곤 했다. 동대문운동장에서 파월장병 환송식이 열리던 날이다. 남의 전쟁이었던 베트남을 향하며 등에 태극기를 꽂은 꽃다운 젊은이들이 가장 소중한 가족과 이별하는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시골에서 올라온 어머니의 모습, 비닐 가방을 손에 든 촌로가 애처로운 눈빛으로 아들을 바라본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지만 애써 꾹 참고 있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보며 자식은 손수건으로 땀을 닦는 척하며 슬쩍 눈물을 훔친다.
배경 없고 힘 없는 이 땅의 젊은이들이 그렇게 전쟁터로 떠났고 모든 어머니들이 그렇게 아들들을 보냈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돌아올지 모른다. 내 카메라에 찍혔던 그 어머니와 아들이 전쟁이 끝난 후 어떻게 틈쩝?나 또한 알 수가 없다. 많은 이들이 동작동 국립묘지에 묻혔을 것이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그 어머니의 표정…. 우리 모두에게 아픈 역사로 남아있는 정지된 기억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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