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소녀의 표정은 밝았다. 특유의 병원 냄새가 지긋지긋할 터. 하지만 소녀는 그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끔찍했던 악몽도 여전히 소녀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지만 시간의 흐름에 밀려 조금씩이나마 물러나는 듯해 보였다. 지난 6월 학교운동장에서 초등학생을 납치, 성폭행한 '김수철 사건'의 피해자 A(8)양이 입원한 서울 신대방동 병원을 13일 오후 찾았다. 초콜릿 케이크를 든 기자와 눈이 마주친 A양은 얼굴에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난 6월 사건 초기 몇 차례 병실을 찾았을 때 A양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저 가녀린 등을 돌려 세상의 모든 이들로부터 벗어나려 했다. 그러던 A양이 맨발로 병실 안을 뛰어다녔다. 평범한 어린이를 보는 듯 했다.
병실 침대 위에는 만화책과 함께 A양이 그린 듯한 그림 몇 장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어머니 박모(38)씨는 "요즘 딸 아이가 만화책을 즐겨 본다"며 "가끔은 공주 등을 그린 그림에 말풍선도 넣어 만화를 만들어 보여주기도 한다"고 웃었다.
A양은 물론 가족이 모두 병실에서 꼬박 6개월을 살고 있다. 한시도 A양과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다. 박씨는 병실 바닥에서 새우잠을 자고 A양의 아버지는 지난 8월 다니던 회사도 그만뒀다. A양의 '유일한 친구'라는 친동생(7)도 사건 이후 학교도 가지 않은 채 누나의 말동무가 돼 주고 있다. 온 가족이 A양의 회복을 위해 매달려온 것이다.
요즘 A양은 가끔 병원을 나와 엄마와 마트에 장을 보러 가거나 이사한 집에 찾아가기도 한다. 박씨는 "병원생활이 힘든지 '라면을 먹어도 집에서 엄마밥을 먹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며 "그래서 지난주에는 집에 데려가 계란찜을 해주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A양의 사회적응은 힘겨운 듯 했다. 박씨는 "버스 정류장에서 옆에 남자가 앉으면 딸이 계속 곁눈질을 하고 그날의 악몽이 되살아나는지 울음을 터뜨리는 때도 있다"며 안쓰러워했다. 누나의 사고를 알게 된 당시의 충격 때문에 A양의 동생도 지금 해바라기 아동센터에서 심리치료를 받고 있다.
A양은 지난 6개월 동안 상처 봉합수술만 6번, 전신마취 수술은 3, 4번 정도 했다. 그리고 지난 15일 마지막으로 배변주머니를 떼는 수술을 받았다. 하루 2, 3번씩 배변주머니가 터져 침대 시트가 변으로 범벅이 되곤 한 터여서 가족이 모두 기뻐했다. 박씨는 "이제 배변주머니를 달고 다니지 않아도 되지만 배변 기능은 70%정도 밖에 돌아오지 않는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박씨는 내년 1학기 A양이 동생과 함께 학교로 돌아갈 수 있도록 전학 갈 학교를 알아보고 있다. 박씨는 "담장을 허물어 공원화 사업을 하는 그런 학교에는 절대 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단호히 말했다. "아이를 학교 앞까지 데려다 주고도 이런 끔찍한 일이 생겼다. 학교라고 안전하리라 어떻게 믿겠느냐"는 게 박씨의 말이다.
새로 이사 갈 집은 아파트로 구했다. 예전 집이 가로등도 제대로 없는 주택가였던 지라 그 반작용이다. 하지만 박씨의 얼굴엔 근심이 가득했다. 이유인 즉 이사 갈 집이 사고 현장에서 차로 15분 거리 밖에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박씨는 "할 수만 있다면 아주 먼 곳으로 가고 싶었지만 없는 형편에 아파트를 구하는 게 하늘에 별 따기였다"며 "아파트도 무리를 해서 월세로 들어가는 것"이라며 고개를 떨궜다. A양 가족은 범죄 피해자 지원금 등을 받았지만 6개월 동안 밀린 병원비에 A양의 아버지가 아직 일을 구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딸의 곁을 지키던 아버지의 표정이 어두워 보였다.
아버지는 사고 직후 천인공노할 범죄의 성격에 비해 미성년자 성폭력범에 대한 형량이 적다고 한탄했지만 김수철은 지난 10월 항소심에서도 무기징역이 선고돼 사회로부터 격리됐다. 그는 대법원 상고를 포기했다. 하지만 A양 가족의 법정투쟁은 이게 끝이 아니다. 지난 7월 서울시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사건 당시 '방과 후 학교'에서 아이의 결석을 통보하지 않았고, 학교 경비원은 낯선 사람이 아이를 납치하는 것을 제지하지 못한 관리소홀에 대해 시설운영권자인 서울시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서울시는 "방과 후 교사는 민간사업자 측의 강사로 시가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학교 경비원의 책임문제에 대해서도 "지금껏 학교 내에서 이런 일이 없었던 만큼 '김수철 사건'은 학교 내에서 통상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이라고 볼 수 없다"며 배상 책임을 부인하고 있다. "아이를 지켜주지 못해 죄의식을 느낀다"는 박씨는 "내가 잘못한 것인지, 학교가 잘못한 것인지 책임을 꼭 따질 것"이라며 서울시 답변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A양은 지난 8월 새 집으로 이사하면서 처음으로 자기 방이 생겼다. 천장에 아름다운 분홍색 레이스가 달린 예쁜 방이다. 교육청과 학교에서 A양의 방에 핑크색 꽃무늬 벽지와 함께 수납장에는 색종이와 크레파스 등 학용품들을 가득 채워주었다. A양과 가족은 이 집에서 이제 새로운 삶을 다시 시작할 것이다.
김현우기자 777hyunwoo@hk.co.kr
■ 아동성폭행 올해 1000여건
지난 6월 '김수철 사건' 발생 이후 정부는 재발 방지를 위해 다양한 대책을 내놓았지만 아동 성폭력 사건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교육과학기술부는 김수철 사건 발생 직후인 7월부터 '24시간 학교 안전망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정규 수업시간에는 배움터 지킴이와 교직원, 방과 후 활동시간에는 관내 경찰과 자원봉사자, 야간부터 새벽까지 경비 용역업체가 학생을 보호하는 제도다. 또 경찰청은 전국에 지방청 성폭력 특별수사대를 설치, 여성과 아동 대상 성범죄에 대한 수사 업무를 전담케 하는 등 다방면의 방안을 강구했지만 전혀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경찰청에 따르면 올해 11월까지 발생한 아동 성폭행 사건은 995건으로 한 달에 90건, 하루에 3건 꼴로 발생하고 있다. 이대로라면 올해 아동 성폭행 사건은 1,085건으로 지난해 발생건수(1,017건)를 훌쩍 넘길 전망이다. 대책이 무색하게도 오히려 늘어난 것이다. 특히 김수철 사건 발생 이후인 7~11월 다섯 달간 발생 건수는 550건으로 상반기 445건보다 많았다.
특히 정부가 성폭행 재범률을 낮추기 위해 도입한 전자발찌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달 부산 해운대구의 한 모텔에서 초등학생 A(10)군을 성폭행한 여모(40)씨는 전자발찌를 찬 채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여씨는 3차례 아동 성폭행 전력이 있다. 아동성폭력피해센터인 해바라기아동센터 우경희 부소장은 "정부가 최근 여러 대책을 시행하고 있지만 실효를 거둘만한 방안이 아니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박동혁 여성가족부 아동청소년보호과 사무관은 "내년에는 초등학교를 중심으로 아이들의 동선을 따라서 성범죄자 주거지역, 폐쇄회로(CC)TV 설치지역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아동안전지도'를 만드는 등 추가적인 아동 안전대책을 마련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현우기자 777hyunw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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