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겨울 지리산에 와 있어. 무거운 어둠과 칼날 세운 추위를 견디며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어. 나는 내 상처를 감싸 안고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어. 짐승들이 자신의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듯 나도 내 상처를 치료하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해줘. 나의 상처는 바로 나야.
자신의 병은 자신이 제일 잘 알듯이 내 상처도 내가 잘 알아. 그때 나는 스무 살을 지나가고 있었어. 나는 거울 속에 비친 나를 기억하고 있어. 늘 화가 난 얼굴. 짜증스런 말투에 목소리만 높이던 나를. 나에 대한 나의 콤플렉스를 잘 알고 있었지만 삶에 대해 조로하여 신용불량자가 되어버린 나를 신뢰할 수 없었어.
끝없이 추락하다 잠에서 깨어나면 열 손가락이 피에 젖어 있었어. 달아나고 싶었어. 내 발을 붙잡는 것도 나였어. 새벽이면 신발 끈 단단히 묶고 떠났지만 밤이면 젖어 무거워진 신발을 신고 되돌아와 흐느끼며 울었어. 가로등 아래서 조르바를 흉내 내던 나를 만났어. 흑백다방 벽에다 시를 쓰던 나를 만났지만 나는 나의 탈출구가 아니었어.
아직 어둠은 가벼워지지 않아. 지리산을 다 덮은 이 어둠을 걷어내려면 얼마나 큰 부리를 가진 장자의 붕새가 날아와야 할까. 웅크린 내 속의 내가 춥다고 보채고 있어. 나는 결코 망명자가 될 수 없었어. 허세였어. 아니 무지였어. 아직도 나는 나를 기다리며 망명을 꿈꾸는 작은 항구일 뿐이야.
정일근 시인·경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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