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鰲城)과 한음(漢陰)은 선조·광해군 조의 사람으로 가까운 친구였다. 그리고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같은 동네에서 살았던 것은 아니다. 오성은 한음보다 5살이 더 많다.
그들은 과거시험장에서 처음 만나 일면여구(一面如舊)가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같은 시험에 급제한 것도 아니다. 한음이 문과에도 빨리 급제했고, 벼슬도 빨리 올라갔다. 다 같이 영의정을 역임했지만 한음은 37세에 영의정이 되었지만, 오성은 그보다 훨씬 늦었다.
한음은 이덕형의 호이지만, 오성은 이항복의 군호(君號)일 뿐이요, 호는 처음에 필운(弼雲)이라 했다가 뒤에 백사(白沙)로 바꾸었다. 오성이 필운동(弼雲洞)에 있는 처갓집에 살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창덕여고 뒤에는 필운대(弼雲臺)가 있다. 오성은 해학도 좋아하고 사람도 잘 사귀었으나 한음은 수재였고, 착실했다. 그러나 국사를 논의할 때는 뜻이 맞았다.
두 사람은 유명한 장인을 둔 것으로도 유명하다. 오성의 장인은 임진왜란 때 도원수로 행주대첩(幸州大捷)을 이끈 권율(權慄)이요, 한음의 장인은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李山海)였다. 두 사람은 어릴 때 대단히 가난했던 공통점이 있다. 오성은 소과에 급제해 성균관 기재(寄齋)에서 공부한 적이 있었다. 이 때 영의정을 지낸 권율의 아버지 권철(權轍)의 권유로 권율의 사위가 되었다. 한음은 이산해의 삼촌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의 추천으로 이산해의 사위가 되었다. 왜 가난한 한음을 추천하느냐고 했더니, "너보다는 먼저 영상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오성은 서인, 한음은 남인이지만 두 사람은 당파와 무관하게 사람을 사귀었다.
그러면 두 사람은 국가를 위해 어떤 역할을 했는가? 오성은 우선 선조 때 병조판서로서 병권을 장악하고 있던 사람이다. 그래서 광해군 조의 대북정권에서도 오성을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 그는 장만·정충신·남이흥 등 무장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었으며, 선조가 의주로 피난할 때는 도승지로서 가장 가까이서 호종했고 그 때문에 호종1등공신(扈從功臣)이 되었다. 이에 비해 한음은 외교관으로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일본과 명에 사신으로 가 일본과 평화조약도 맺고 명나라 원병을 끌어들이기도 했다. 만약 명나라의 원병이 오지 않았더라면 조선은 멸망하고 맡았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대북정권의 폐모살제(廢母殺弟)를 반대하다가 죽었다. 한음은 1513년(광해군 5) 8월 8일에 영의정으로서 영창대군을 죽이는 것을 반대하다가 9월에 삭탈관작되어 용진(龍津)으로 물러나 울면서 굶어 죽었고, 오성은 그의 묘지문(墓誌文)을 써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리고 오성도 1617년(광해군 9) 11월 23일에 폐비정청(廢妃庭請)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역시 삭탈관작되어 용강(龍岡) 북청(北靑)으로 귀양갔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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