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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사건&사람]<3> 천안함 故최정환 상사 부인 최선희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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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사건&사람]<3> 천안함 故최정환 상사 부인 최선희씨

입력
2010.12.20 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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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北 연평도 포격에 다시 마음 무너져…"

어제 퇴근해 집에 왔는데, 의영(딸)이가 어디서 배웠는지 '아빠'라고 또박또박 말하며 저를 쳐다봤어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더군요. 신랑은 손이 거칠어 의영이가 다친다고 제대로 한번 안아주지도 못했는데, 벌써 저렇게 컸나 싶어서…."

올 3월 천안함 침몰로 희생된 고(故) 최정환(32) 상사의 부인 최선희(33)씨는 다음 달 돌을 맞는 딸 의영이의 목소리가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간 남편이 애석해 소리 내 울지도 못했다.

서해에서 천안함이 두 동강 난 3월 26일은 남편 최 상사가 복귀를 이틀 앞둔 날이었다. 딸 크는 것 보겠다고 육지근무를 자원해두고 마지막으로 탔던 배였다. 그러나 3월12일 선희씨의 생일을 마지막으로 출항에 나섰던 최 상사는 결국 천안함 침몰 20일만인 4월15일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왔다.

21일 기자와 만난 선희씨는 지난 봄 북한 도발의 악몽을 지우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부부는 고인 후배의 소개로 만나 5년 연애 끝에 지난해 5월5일 백년가약을 맺었다. 1996년 10월 해군 부사관 168기 의무하사로 임관한 고인은 생전 악착같이 배를 탔다. 결혼 전에는 100만원 남짓한 하사 월급을 꼬박꼬박 저축하고, 배를 타면 나오는 수당을 합쳐 13년간 5,000만원을 모아 부모님이 농가주택을 짓는데 보탰다. 결혼 후에도 부부는 절약하고 저축하는 깨알 같은 재미에 푹 빠져있었다.

"신랑이 '자기야, 나 제대하면 안 될까. 요리사 하고 싶은데'라고 묻던 날도 있었어요. '마흔 살 되면 연금 개시되니까 그전까지 우리 저축 열심히 해서 요리하자'고 약속도 하고. 그렇게 희망이 많았죠."

사고 소식과 기나긴 실종자 수색 과정은 1월 의영이를 출산하고 산후조리를 갓 마친 선희씨가 감당하기에 너무 큰 고통이었다. 20일 넘게 젖먹이 딸을 부둥켜 안고 울다 깨다 실신하기를 수 차례. 선희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괴로움에 몸서리쳤다.

"평소 동상(凍傷)입은 흔적이 신랑의 손을 뒤덮고 있었어요. 훈련 때마다 추위에 살갗이 어니까요. 덩치 크고 씩씩한 군인이 추운 것은 도저히 못 견디겠다고 했는데, 그 추운 바다에 있다고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었어요."

영결식으로부터 8개월 남짓 시간이 흘렀지만 깊은 상처는 결코 그 짧은 시간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선희씨의 부모도, 친구들도 모두 함께 의영이 얼굴만 봐도 눈물 짓는 선희씨를 위해 수개월째 칩거했다. 하지만 습관적으로 고인에게 전화를 거는 것도, 우연히 들른 은행에서 '아내 가방 사주겠다'고 고인이 꼬박꼬박 수당의 자투리를 모아온 계좌를 발견하고 통곡하는 것도, 딸의 100일 날 남편의 빈 자리를 느끼는 것도 모두 선희씨 홀로 감당할 몫이었다.

"왜 하필 그날 그때 북한이 그랬을까, 왜 하필 내 신랑에게 이런 일이 생겼나 늘 그런 생각으로 잠이 오질 않았죠."

요원한 일상을 향해 달려가던 선희씨를 또 한번 주저앉힌 것은 북한의 연평도 포격 소식이었다. 또 다시 군과 민간인이 북한의 도발로 희생됐다는 사실에 망연자실 한 것. 기실 연평도는 고인에게도 각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었다. 해군 연평부대에 3년을 근무했고, 99년에는 제1연평해전에 참전해 전투유공표창을 받기도 했다. 고인은 제1연평해전 전사자 6명을 직접 검안한 의무장이었다. "시간은 지났지만 거듭되는 일들에 자꾸 남편이 떠오르고 감정이 이입된다"고 토로했다.

그 사이 다른 가족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고인의 부친 최근해(66)씨는 영결식 직후 위암 초기 판정으로 수술을 했다. 천안함46용사유족협의회 대표를 맡았던 고인의 매형 이정국(39)씨는 생계에서 손을 놓고 유족협의회 자문위원으로 나섰다. 이씨는 "'패잔병에게 너무 잘해주는 것 아니냐'는 소리까지 하는 모진사람들이 많았다"며 "가족의 희생이 값진 것으로 기억되게 하고 이런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만이 살아있는 사람들의 도리 아니겠냐"고 했다. 그는 국방부 해군 등을 찾아 다니며 대안 마련을 촉구할 계획이다.

선희씨도 올 10월 기운을 내 서울에 새 직장을 구했다. 경기 화성시의 집에서는 1시간 넘는 거리로 전 직장보다 배 이상 멀지만 주변을 새롭게 하기 위한 노력이다. 새로운 집으로 이사도 할 계획이다.

"괜찮은 것 같다가도 문득 이게 꿈인가 싶고, 아직도 신랑이 살아있는 것 같이 행동할 때가 많아 힘들어요. 사실 지금 이 순간도 그래요. 신랑은 세상을 떠났는데 인터뷰가 무슨 소용인가 싶고…." 질문이 목구멍에서 턱 막힌 기자가 침묵하자 선희씨가 먼저 입을 뗐다.

"그래도 어른들이 늘 그러시잖아요. '버틸 수 있다' '세상엔 더 한 상처를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다' '군인인데 군인답게 가서 얼마나 다행이냐.' 조금씩 어떤 말씀인지 알 것 같아요. 아빠를 꼭 빼 닮아 벌써 세 살 애들만큼 발이 기다란 우리 의영이 보면서 힘을 내야죠."

새 삶을 다짐하는 선희씨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김혜영 기자 shine@hk.co.kr

■ 포격 도발에도 연평도를 지킨 사람들

인천 옹진군에 속한 연평도(대연평 7.1㎢ㆍ소연평 0.24㎢)는 북한 해안포 진지와 불과 12㎞떨어져 있다. 백령도 대청ㆍ소청도 우도와 함께 서해5도인 이곳은 지난달 23일 북한의 포격 도발에서 보듯 언제든 북한의 직접적인 공격 위험에 노출돼 있다.

굴과 바지락을 캐고 꽃게 주꾸미 등을 잡으며 생업을 이어가는 연평도 주민들(933세대 1,400여명)은 6ㆍ25전쟁 이후 처음인 북한의 영토 공격에 아직까지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 뭍으로 피난을 떠났고 현재 섬에 남아 있는 주민은 140명 정도. 그러나 포격 이후 한번도 떠나지 않고 섬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

군 당국의 해상포사격훈련 다음날인 21일 전날의 긴장감이 채 가시지 않았지만 이기옥(49ㆍ여)씨는 오전에 갯벌에 나가 굴을 캤다. 2시간 남짓 작업으로 수확한 굴은 1관(4㎏) 정도, 5만원가량 되는 양이다. 그는 "평소 같으면 오전 9시쯤 나가 오후 2시까지 3관 정도 캔다"며 "부모가 물려주고 나를 길러준 땅인데 버릴 수 없지 않겠어"라고 했다.

그에게 섬은 삶의 터전이자 지켜야 할 조국과 다름 없다. 이씨는 "북한이 도발하는 목적이 우리를 여기서 쫓아내고 지(자기)네 영토로 만드는 거야. 우리 주민들이 꿋꿋하게 버텨야 군인들한테도 힘이 되지"라고 힘줘 말했다.

부친에 이어 연평우체국장을 하고 있는 정창권(56)씨도 "부친의 손때가 탄 우체국을 두고 어딜 가겠냐"고 손사래를 쳤다. 뭍으로 나오라는 자식들의 성화에도 그를 붙드는 것은 토박이로서의 자존심과 기관을 맡고 있는 책임감이다.

꽃게 판매업을 주로 하는 김정희(45)씨도 "지금 뭍으로 피해 있는 주민들도 결국 연평도로 돌아올 것"이라며 "정신적 충격이 없진 않겠지만 부모 형제가 있는 고향을 어찌 등질 수 있겠냐"고 되물었다.

도발과 훈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진득하게 섬을 지키는 이들에게 다시 포탄이 떨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없을까. "우리 정부 지원 받을 거 다 받으면서도 도발하는 '알쭝알쭝한'(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한다는 황해도 방언) 북한 놈들 미워서라도 남아 있어야 돼. 그깟 포탄 몇 발 떨어졌다고 겁나지 않아." 굴 따던 이기옥씨가 정색하고 말했다.

연평도=이성기 기자 hangi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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